지역주의에 맞선 '바보 노무현'에서 참여정부를 이끈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쉬운 길이 생길 때마다 다시 어려운 길로 간 사람
#12002년 12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둔 밤이었다.
#2노무현은 과 후보 단일화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이회창 후보와의 승부에서 단일화는 결정적인 승부수였다. 그런데 정몽준이 갑자기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하필 투표 전날 밤이었다.
#3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한 정치적 대형 사고였다. 그런데 노무현의 인생을 처음부터 보면 이상하게 익숙한 장면이기도 했다.
#4이 사람은 일이 좀 풀릴 만하면 다시 어려워졌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그중 상당수가 본인이 선택한 어려움이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그 전날 밤보다 56년 전, 경남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다.
#51946년 9월 1일, 노무현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가지 못했다. 부산상고를 졸업해 회사에 취직했지만 오래 다니지 않았다. 대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6문제는 공부할 환경부터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6년 노무현은 둘째 형 과 봉하에 아홉 평 남짓한 작은 토담집을 직접 지었다. 아버지는 구슬을 갈고닦듯 공부하라는 뜻을 담아 이곳을 '마옥당'이라고 불렀다.
#7부엌 한 칸, 공부방 한 칸. 책상과 의자, 침구 정도가 전부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시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고시원을 직접 건축하고 입주한 셈이었다.
#8사법시험 준비물은 육법전서, 필기구, 그리고 집 한 채였다. 1973년에는 같은 봉하마을에서 자란 과 결혼했다. 아직 사법시험 합격자도 아니었다. 아이도 생겼다.
#9그리고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합격자 60명 가운데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대학에도 가지 못한 상고 졸업생이 법조인이 됐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판사까지 됐다.
#10사실 전기라면 여기서 음악이 올라와도 된다. 가난한 고졸 청년이 판사가 됐다.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었다.
#11그런데 노무현은 판사를 그만뒀다.
#121978년 노무현은 변호사로 개업했다. 처음부터 거대한 민주화운동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3세무·조세 분야 등을 다루며 변호사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의 방향을 크게 틀어놓은 사건이 1981년 발생했다. 이었다.
#14부산 지역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을 불법 연행해 장기간 구금하고 고문한 공안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 변론을 맡아 구금된 학생을 접견했다. 62일간 구금돼 구타와 고문을 당한 학생이었다. 노무현은 훗날 당시의 충격을 자신의 글에 남겼다.
#15그 만남 이후 돈 잘 버는 변호사 노무현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권·노동 사건을 맡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6그런데 부림사건의 재미있는 후일담은 사건이 끝난 뒤에 있다. 피해자였던 은 출소 후 노무현을 다시 찾아갔다. 노무현은 그를 반갑게 맞았고 결국 자신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또 다른 피해자 장상훈이 결혼할 때는 노무현이 생애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피로연에서는 함께 춤도 췄다.
#17그러니까 이 관계는 '정의로운 변호사가 피해자를 구했다'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볼 수도 있다. 부림사건의 사람들이 노무현을 바꿨다.
#18그리고 1982년, 노무현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 들어온다. 이다.
#19두 사람은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노동 사건을 맡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직원의 회고에는 꽤 기막힌 장면도 남아 있다.
#20시위가 벌어질 때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두 변호사가 집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사무실에 찾아오곤 했다. 직원들이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21그리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창문을 넘어 빠져나갔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남자 두 명이 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둘이 나란히 창문을 넘어 집회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사의 상당히 희한한 예고편이었다.
#22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2003년에, 다른 한 명은 2017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231987년 6월항쟁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8년 정치에 입문했다. 이 이끌던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24곧 전국적인 무대가 찾아왔다. 5공 비리 청문회였다. 초선 의원 노무현이 전직 권력자와 재벌 관계자들을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모습이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됐다. '청문회 스타'가 됐다.
#25고졸 출신 변호사. 민주화운동가. 국회의원. 전국구 정치 스타. 드디어 정치에서도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26약 2년간.
#271990년 한국 정치의 판을 뒤흔든 이 벌어졌다.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쳤다.
#28부산에서 정치를 계속할 노무현에게 김영삼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3당 합당을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했다.
#29이 선택은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인생을 결정한다. 지역주의 극복은 그의 오랜 정치적 과제가 됐다. 그리고 선거가 시작됐다.
#301992년 총선. 낙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낙선. 1996년 총선. 또 낙선.
#31청문회 스타였던 정치인이 선거에서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당선됐다. 드디어 답을 찾은 것 같았다.
#32부산에서는 졌다. 서울에서는 이겼다. 정치적으로 꽤 쉬운 문제였다. 그래서 2000년, 노무현은 당선된 종로를 버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33게임이 어려워서 쉬운 맵으로 이동했더니 이겼다. 그러자 원래 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졌다.
#342000년 총선에서 노무현은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해 낙선했다. 정치인에게 선거 패배는 보통 정치적 자산을 잃는 사건이다. 그런데 여기서 노무현 인생 특유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35너무 인상적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역주의에 맞서 계속 부산에 출마하는 그를 두고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를 만들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36유튜브도 없었다. 페이스북도 없었다. 트위터도 없었다. 스마트폰은 더더욱 없었다.
#37그런 2000년에 낙선한 정치인을 중심으로 인터넷 정치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노무현은 선거에서 졌다. 그런데 대통령이 될 때 필요한 사람들을 얻기 시작했다.
#38이후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압도적인 후보는 아니었다.
#39하지만 국민참여경선이 시작되고 광주 경선을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노풍'이 불었다. 조직과 계파 중심의 기존 정치에서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정치인에게 시민과 온라인 지지층이 몰렸다.
#40계속 낙선했던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는 처음의 그날 밤으로 돌아온다. 2002년 12월 18일. 대선을 하루 앞두고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이 쉽게 끝나지 않았다.
#41다음 날인 12월 19일 투표가 진행됐다. 노무현 48.9%. 46.6%. 노무현 당선.
#421975년 사법시험 합격자 60명 가운데 유일했던 고졸 합격자가, 27년 뒤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43잠깐 1960년대 봉하로 돌아가보자. 아홉 평짜리 토담집. 책상. 시험을 준비하는 부산상고 졸업생.
#44그리고 다시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인 노무현. 같은 사람이다.
#451973년 무명의 고시생과 결혼했던 권양숙은 29년 뒤 대통령 당선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노무현은 마침내 대한민국에서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46그러자 이번에는, 그 자리 자체가 없어질 뻔했다.
#47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정부의 이름은 . 탈권위주의, 국민 참여,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정부혁신 등이 중요한 국정 방향이었다. 행정수도 이전과 공공기관 지방 이전 역시 이 흐름에 있었다. 훗날 세종특별자치시로 이어지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구상도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였다.
#48그런데 취임 약 1년 만인 2004년 3월,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권한이 정지됐다. 노무현은 대통령인데 대통령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49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벌어졌고 이어진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2004년 5월 가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노무현은 돌아왔다. 또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50여기까지 보면 이제 노무현 인생의 법칙을 알 것 같다. 문제는 대통령직 복귀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51대통령 노무현은 정치인 노무현보다 훨씬 복잡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한미 FTA를 추진했다. 대연정을 제안했다.
#52부동산 가격 문제는 참여정부의 큰 정치적 부담이 됐다. 검찰,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충돌했다.
#53특히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 같은 선택은 노무현을 지지했던 진보·개혁 진영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노무현다운 대통령'을 기대했던 사람들과 실제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 대통령 노무현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54반면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권위주의적 대통령 문화의 변화, 행정혁신 등은 참여정부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노무현을 영웅으로만 쓰면 이 시기의 갈등이 사라진다. 반대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만 쓰면 왜 그의 정치가 이후까지 영향을 남겼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55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계속 논쟁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대통령 노무현에게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야당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노무현'이라는 기대 자체였다.
#562007년 10월. 노무현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군사분계선 앞에서 자동차에서 내렸다. 걸어서 선을 넘었다.
#57북측에서 과 만났고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평가와 논쟁을 떠나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가는 현직 대통령의 모습은 참여정부 후반을 상징하는 강렬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됐다.
#58그리고 몇 달 뒤, 대통령 임기가 끝났다. 2008년 2월 25일 노무현은 퇴임했다.
#59그의 다음 목적지는 서울의 사저가 아니었다. 자신이 출발했던 곳이었다. .
#60노무현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과 동시에 고향으로 귀향했다. 대통령 시절 수도권 집중을 비판하고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주장했던 사람이 퇴임한 뒤 실제 지방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61봉하에서 그는 주민들과 친환경 생태농업을 추진하고 화포천 환경 보전과 마을 만들기에 관심을 쏟았다. 전직 대통령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다. 노무현은 방문객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62대한민국 대통령의 다음 직업을 굳이 적는다면, '봉하마을 주민'에 가까웠다.
#63여기서는 그의 인생에서 드물게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에서 멀어졌다. 농사를 지었다. 마을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났다.
#641946년 봉하에서 시작한 사람이 62년을 돌아 다시 봉하에 있었다. 이제는 정말 이곳에서 늙어갈 것처럼 보였다.
#652009년 상황이 급변했다. 박연차 관련 수사가 노무현의 가족과 주변으로 확대됐다. 금품수수 의혹이 제기됐고 노무현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강조해온 도덕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타격은 컸다.
#66여기서는 이 사건을 지워서는 안 된다. 노무현의 마지막을 단순히 정치적 박해의 이야기로만 만들 수도 없고, 제기된 모든 의혹을 확정된 사실처럼 쓸 수도 없다. 당시 수사는 노무현 개인과 가족에게 거대한 정치적·심리적 위기가 됐다.
#67그런데 그의 인생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상한 기대가 생긴다. 노무현은 항상 떨어졌다. 그리고 돌아왔다.
#68선거에서 떨어졌다. 다시 출마했다. 부산에서 계속 졌다. 결국 대통령이 됐다. 탄핵됐다. 대통령직으로 돌아왔다.
#69그러니 이번에도 어딘가에 다음 장면이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70이번에는 없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은 봉하마을 자택을 나와 봉화산에 올랐다. 그리고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향년 62세.
#71노무현의 죽음 뒤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설치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봉하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마을에 묘역이 만들어졌다.
#72거대한 비석은 없다. 낮은 너럭바위에 여섯 글자가 새겨졌다. 대통령 노무현.
#73주변 바닥에는 시민들의 추모 글을 새긴 수많은 박석이 놓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무현이 태어난 집이 있다. 그리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작은 토담집 마옥당도 있다.
#74묘한 배치다. 한쪽에는 대통령 노무현이 누워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대통령은커녕 변호사도 아니었던 스무 살 청년 노무현이 공부하던 작은 집이 있다. 그 두 장소 사이에 거의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들어 있다.
#75가난한 농부의 아들. 부산상고 졸업생. 고시생. 판사. 인권변호사. 민주화운동가.
#76청문회 스타. 낙선 정치인. '바보 노무현'. 대통령 후보. 대통령. 탄핵된 대통령. 돌아온 대통령. 그리고 다시 봉하마을 주민.
#77그런데 이야기는 2009년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782026년 5월 23일.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지났다. 봉하마을에서 17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노무현재단은 이날 전국에서 약 2만 5천 명이 봉하를 찾은 것으로 추산했다.
#79권양숙이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도 있었다. 2022년부터 5년 연속 참석이었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 도 참석했다. 현직 대통령의 노무현 추도식 참석은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이후 9년 만이었다.
#8017년 전 죽은 대통령의 고향에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사실은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81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성공과 실패가 함께 있었고 정책을 둘러싼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설명해야 하는 현상이 하나 남는다.
#82왜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을까.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랬다. 선거에서 계속 떨어지는데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낙선하자 노사모를 만들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지지자들까지 그에게 화를 냈다.
#83그런데 죽은 뒤에도 봉하를 찾았다. 17년 뒤에도 왔다. 어쩌면 노무현을 이해할 때 정말 흥미로운 질문은 '가난한 고졸 청년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84더 이상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85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가면 한 사람이 다시 등장한다. 1980년대 부산. 노무현과 같은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던 젊은 변호사. 정보기관 사람들이 집회에 가지 못하게 막자 노무현과 함께 창문을 넘어 빠져나갔던 사람.
#86대통령 노무현의 곁에서 일했고, 2009년 친구의 마지막을 지켰던 사람. 문재인.
#87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인 2017년, 그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88그렇다면 이야기는 이상하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훗날 두 명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젊은 변호사들은, 도대체 부산의 그 작은 법률사무소에서 무엇을 함께 겪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