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와 전쟁 속에서 다음 판단을 계속 바꿔간 대통령
상원의원 선거에서 진 링컨은 어떻게 2년 뒤 대통령이 됐을까
#11858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상원의원이 되고 싶었어. 상대는 이미 전국적인 정치인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였지.
#2둘은 일리노이주를 돌며 일곱 차례 공개 토론을 벌였어. 가장 뜨거운 문제는 노예제였고, 특히 새로 생기는 서부 지역에 노예제를 퍼뜨릴 수 있느냐를 두고 맞붙었지. 신문들이 토론을 실으면서 링컨의 이름도 일리노이 밖으로 퍼져나갔어.
#3그래도 선거에서는 졌어.
#4당시 미국 상원의원은 주민이 직접 뽑지 않고 주의회가 선출했는데, 더글러스 쪽이 필요한 지지를 확보했거든.
#5링컨은 원하던 자리를 얻지 못했어.
#6그런데 이름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지.
#7링컨은 링컨-더글러스 논쟁 기록을 모아두고 출판으로 이어갔어. 상원의원 자리는 놓쳤지만, 그 선거 덕분에 생긴 전국적 관심까지 버릴 이유는 없었던 거야.
#8그리고 2년도 지나지 않아, 상원의원이 되지 못했던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돼.
#9링컨에게는 나중에 꽤 유명한 전설이 붙었어.
#10사업에 실패하고, 선거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다가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지.
#11실제 경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121832년 첫 주의회 선거에서는 졌지만 1834년에는 당선됐어. 이후에도 세 차례 더 주의원에 뽑혔고, 1846년에는 연방 하원의원도 됐지.
#13그러니까 링컨의 특별한 점은 계속 선거에서 졌다는 데 있지 않았어.
#14중요한 패배 뒤에, 전과 다른 위치에 서게 됐다는 쪽이 더 정확해.
#15연방 하원의원 한 임기를 마친 뒤에는 전국 정치에서 크게 치고 올라가지 못했어. 1849년에는 연방 토지행정을 맡는 자리를 원했지만 얻지 못했고, 다시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 생활에 집중했지.
#16이대로 전국 정치에서 멀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어.
#17그런 링컨을 다시 끌어낸 게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었어. 새 지역 주민들이 노예제를 허용할지 결정할 수 있게 길을 연 법이었지.
#18링컨은 노예제가 서부로 더 퍼지는 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다시 연설을 시작했고, 1855년 상원의원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어. 1858년 더글러스에게 다시 도전했고, 또 졌지.
#19그런데 이번 패배는 달랐어.
#20전국 사람들이 링컨을 알게 됐거든.
#211858년 토론은 끝났지만, 링컨은 그 기록을 놓지 않았어.
#22오하이오에서도 연설했고, 1860년 2월에는 뉴욕의 쿠퍼 유니언 연설 무대에 섰지.
#23동부의 정치인과 주요 언론이 지켜보는 자리였어.
#24링컨은 노예제의 서부 확장을 막는 일이 미국 건국자들의 생각과 어긋나는 급진적인 발상이 아니라고 차근차근 논증했어. 법정에서 오래 일한 변호사답게 복잡한 문제를 잘게 나눠 설명하는 데 강했지.
#25연설은 성공했어.
#26이제 링컨은 단순히 더글러스와 토론했던 일리노이 정치인이 아니었어. 대통령 후보로 생각할 만한 사람이 된 거야.
#27그래도 공화당의 가장 유명한 후보는 따로 있었어.
#28윌리엄 수어드였지.
#291860년 공화당 전당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렸어.
#30첫 투표에서는 수어드가 앞섰어. 전국적 인지도도 높았고 경력도 길었으니까 이상할 게 없었지.
#31하지만 유명한 만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어. 일부 대의원은 수어드가 본선에서 너무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걱정했고, 펜실베이니아나 인디애나처럼 꼭 이겨야 할 주에서 더 넓게 표를 모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봤어.
#32링컨은 묘한 위치에 있었어.
#33이제 무명은 아니야. 노예제 확장 반대 입장도 분명해. 그런데 수어드만큼 많은 적을 만든 사람도 아니었지.
#34시카고에서는 데이비드 데이비스와 노먼 저드 같은 링컨의 동료들이 대의원들을 만나고 있었어.
#35첫 투표에서는 수어드. 두 번째에는 링컨이 바짝 따라붙었고, 세 번째에 표가 더 움직였어.
#36링컨이 후보가 됐어.
#371858년 상원의원 선거의 패자가 1860년 대통령 후보가 된 거야.
#38그리고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까지 이겼어.
#39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어.
#40링컨이 얻은 일반투표는 약 40퍼센트였어.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고, 링컨은 북부에서 강한 지지를 받아 선거인단에서 승리했지.
#41그러자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어.
#42링컨이 취임하기도 전에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까지 빠져나갔고, 일곱 주가 남부연합을 만들었지.
#43물론 링컨 한 사람이 이 갈등을 만든 건 아니야.
#44노예제를 둘러싼 충돌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쌓이고 있었어. 캔자스의 유혈 사태, 흑인 노예를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드레드 스콧 판결, 존 브라운의 하퍼스페리 습격, 새 영토에 노예제를 퍼뜨릴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지.
#45링컨의 당선은 그 모든 원인이 아니라, 이미 갈라지던 나라에 떨어진 결정적인 촉매에 가까웠어.
#46공화당 대통령이 처음 등장했는데, 이 당은 적어도 노예제가 새 영토로 더 퍼지는 건 막겠다고 했거든.
#471861년 4월, 남부연합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했어. 링컨은 병력 7만 5천 명을 소집했고, 버지니아를 비롯한 네 주가 더 남부연합에 합류했지.
#48정치 위기가 전쟁으로 바뀐 거야.
#49이제 링컨에게 필요한 건 표가 아니라 전쟁을 이기는 방법이었어.
#50젊을 때 블랙호크 전쟁에서 민병대장으로 잠깐 복무한 게 군사 경험의 거의 전부였어.
#51처음에는 전문 장군들이 해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
#52그중 가장 기대를 받은 사람이 조지 매클렐런이었어.
#53매클렐런은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데 능했어. 병사들의 신뢰도 컸고, 포토맥군을 제대로 된 대군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했지.
#54문제는 링컨이 그 군대를 실제로 움직이고 싶을 때 생겼어.
#55매클렐런은 적군을 실제보다 크게 보는 경우가 많았고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56링컨에게 그 기다림은 다른 의미였지.
#57하루 기다리면 남군도 하루를 벌어.
#581862년 앤티텀 전투에서 매클렐런은 로버트 E. 리의 북부 침공을 막았어. 링컨은 그 군사적 계기를 이용해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지.
#59하지만 리의 군대는 살아서 버지니아로 돌아갔어.
#60링컨은 추격을 원했어.
#61매클렐런은 그가 원하는 속도로 움직이지 않았지.
#62결국 링컨은 그를 해임했어.
#63그리고 다음 장군을 찾았어.
#64다음은 앰브로즈 번사이드였어. 그는 원래 포토맥군을 맡는 걸 꺼렸고, 자신이 그렇게 큰 군대를 지휘할 사람인지 확신도 없었지.
#65결국 맡았고 프레더릭스버그에서 참패했어.
#66그다음은 조지프 후커였어. 링컨은 후커가 군대와 정부에는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어. 그래도 지휘권을 줬고, 먼저 군사적 성공을 가져오라고 했지.
#67후커는 챈슬러스빌에서 졌어.
#68다음 조지 미드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를 꺾었어.
#69큰 승리였지.
#70그런데 리는 또 버지니아로 돌아갔어.
#71이긴 것 같은데 전쟁은 끝나지 않아.
#72장군을 바꿔도 적의 주력군은 남아 있어.
#73링컨은 지도를 보고 전보를 읽고 장군들과 논쟁하면서, 대통령이 된 뒤에야 대규모 전쟁을 지휘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어.
#74그런데 그 와중에 백악관 안에서도 한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어.
#751862년 2월, 링컨의 어린 두 아들 윌리와 태드가 병에 걸렸어.
#76윌리는 열한 살이었지.
#77몇 년 전 아버지와 시카고에 갔을 때 친구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었어. 호텔방에는 작은 침대와 큰 침대가 있는데, 작은 건 자기 것, 큰 건 아버지 것이라고 썼지. 작은 수건은 자기 것, 큰 수건은 아버지 것이라고도 했고.
#78그 아이가 1862년 2월 20일 백악관에서 죽었어.
#79메리 토드 링컨은 깊은 슬픔에 빠졌고 한동안 거의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어. 윌리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견디기 어려워했지.
#80링컨도 아들을 잃었어.
#81그런데 대통령의 책상은 멈추지 않았어.
#82바로 그 시기에도 다른 가족들은 사형을 앞둔 사람을 살려달라는 탄원을 대통령에게 보내고 있었거든.
#83자기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다른 사람의 생사도 결정해야 했어.
#84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집이 비슷한 소식을 받고 있었지.
#851860년 링컨이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전쟁 영웅이 아니었어.
#86군대를 떠난 뒤 농사도 해보고 다른 일도 했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일리노이주 갤리나에서 가족의 가죽제품 사업을 돕고 있었지.
#87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군대로 돌아왔어.
#88포트 도널슨에서 이겼고, 샤일로에서는 첫날 큰 피해를 입고도 다음 날 반격했어. 빅스버그를 함락시켰고, 채터누가에서도 성과를 냈지.
#89그랜트에게도 실수와 실패는 있었어. 전투는 엄청난 희생을 내기도 했고.
#90그런데 링컨이 동부 장군들에게서 계속 답답해하던 한 가지는 달랐어.
#91그랜트는 움직였어.
#92작전이 틀어져도 그대로 끝내지 않았고, 이긴 뒤에도 멈춰 있지 않았지.
#93더 흥미로운 건, 링컨과 그랜트가 이때까지 직접 만난 적조차 없었다는 거야.
#94링컨이 처음 만나자마자 숨은 천재를 알아본 게 아니었어.
#95그랜트가 먼저 결과를 냈고, 링컨은 그걸 지켜봤어.
#96의회는 중장 계급을 부활시켰고, 링컨은 그랜트를 선택했어.
#971864년 3월, 그랜트가 워싱턴에 와서 대통령을 처음 직접 만났지.
#98그랜트가 원한 건 여러 북군을 동시에 움직이는 거였어. 버지니아에서 리를 붙잡는 동안 조지아에서도 공격하고, 셰넌도어 계곡에서도 압력을 가하는 식이었지.
#99남부연합이 한 전선에서 병력을 빼 다른 전선을 구하러 다니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100링컨이 몇 년 동안 원했던 것도 비슷했어.
#101한 번의 화려한 승리보다, 적에게 다시 숨 돌릴 시간을 주지 않는 장군.
#102드디어 찾은 것처럼 보였어.
#103그런데 그랜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상자 수가 크게 늘었어.
#1041864년 5월부터 그랜트는 리를 계속 따라붙었어.
#105와일더니스. 스폿실베이니아. 콜드하버.
#106싸우고, 큰 피해를 내고, 다시 남쪽으로 움직였어.
#107특히 콜드하버에서는 잘 구축된 남군 방어선을 공격하다 북군이 큰 피해를 입었지.
#108그랜트는 링컨이 원했던 것처럼 멈추지 않았어.
#109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는 건 사상자 명단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었어.
#110전쟁은 4년째였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지.
#111민주당 후보는 매클렐런이었어.
#112링컨이 해임했던 장군이 이번에는 링컨을 백악관에서 끌어내리려는 후보가 된 거야.
#1131864년 여름, 링컨은 자신이 재선되지 못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했어.
#1148월 23일에는 짧은 메모를 써서 접어놓고, 내용을 보여주지 않은 채 각료들에게 겉면에 서명하게 했지.
#115안에는 현 행정부가 재선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며, 그렇게 되면 다음 대통령 취임 전까지 그 당선자와 협력해 연방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었어.
#116링컨은 패배를 준비하고 있었어.
#117그런데 열흘도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어.
#1181864년 9월 2일,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군대가 애틀랜타를 점령했어.
#119남부 깊숙한 곳의 중요한 철도와 산업 중심지였지.
#120그랜트는 버지니아에서 리를 붙잡고 있었고, 셔먼은 조지아로 들어가고 있었어. 필립 셰리든도 셰넌도어 계곡에서 남군을 밀어내고 있었지.
#121여러 전선을 동시에 누르는 전략이 결과를 내기 시작한 거야.
#122물론 애틀랜타 하나만으로 링컨이 재선된 건 아니야. 선거운동도 있었고 민주당 내부의 갈등도 있었어.
#123그래도 몇 달 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지.
#12411월 8일, 링컨은 매클렐런을 꺾었어. 일반투표 약 55퍼센트를 얻었고 선거인단에서는 압도적으로 이겼지.
#125북군 병사들의 표에서도 링컨이 크게 앞섰어.
#126전쟁을 계속할 시간이 다시 생긴 거야.
#127그리고 그때의 전쟁은 이미 1861년과 다른 전쟁이 돼 있었어.
#128링컨은 취임할 때 모든 노예를 즉시 해방시키겠다고 나선 대통령이 아니었어.
#129노예제를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했고 확장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노예제가 존재하는 주에서 대통령이 곧바로 없앨 헌법적 권한은 없다고 봤지.
#130전쟁 초반 최우선 목표는 연방 보존이었어.
#131점진적 해방이나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하는 방안도 생각했고, 한동안은 자유 흑인을 미국 밖으로 이주시키는 식민 이주 구상까지 검토했어.
#132그런데 전쟁 현장은 링컨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어.
#133노예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농장을 떠나 북군 진영으로 들어왔거든.
#134그러자 북군 지휘관들은 이들을 다시 노예 소유주에게 돌려보낼지 결정해야 했어.
#135노예 노동은 남부연합의 전쟁 수행에도 연결돼 있었어. 농장 일을 노예가 맡으면 백인 남성은 군대로 갈 수 있었으니까.
#136의회도 움직였고,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압박했고, 일부 북군 장군은 링컨보다 먼저 지역적 해방 조치를 시도했어.
#137상황이 바뀌면서 링컨의 정책도 움직였지.
#1381862년 여름, 링컨은 노예해방을 전쟁 정책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어.
#139수어드는 발표 시점을 조금 기다리자고 조언했어. 북군이 계속 패배하는 상황에서 발표하면 절박한 정부의 마지막 조치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이유였지.
#140링컨은 기다렸고, 앤티텀 이후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어.
#1411863년 1월 1일에는 노예해방선언이 발효됐지.
#142그날 미국의 모든 노예가 한꺼번에 자유인이 된 건 아니야. 북부에 남은 노예주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남군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북군이 실제로 도착해야 자유가 현실이 될 수 있었어.
#143그래도 전쟁의 성격은 달라졌어.
#144북군이 전진하면 노예제도 함께 무너질 수 있게 됐고, 흑인 남성들도 북군에 입대하기 시작했지. 약 18만 명이 북군 병사로 복무했어.
#145이건 링컨 혼자 자유를 만들어 가만히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준 이야기는 아니야.
#146노예 상태의 사람들이 먼저 움직였어. 흑인 공동체도 움직였고, 의회와 군대도 움직였고,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압박했지.
#147링컨은 그 변화 속에서 대통령의 전쟁 권한을 사용해 해방을 연방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만들었어.
#148그리고 재선 뒤에는 더 영구적인 방법을 밀었지.
#149미국 수정헌법 제13조였어.
#1501865년 1월 31일, 하원이 필요한 3분의 2 찬성을 넘겼어.
#151노예제를 헌법에서 없애는 절차가 앞으로 나아갔지.
#152이제 남은 건 리의 군대였어.
#1531865년 봄, 피터즈버그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리는 서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어.
#154링컨은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봤어.
#155앤티텀 뒤에도 리가 돌아갔고, 게티즈버그 뒤에도 돌아갔지.
#156이번에는 그랜트가 계속 따라갔어.
#157퇴로를 막고, 보급을 끊고, 압박을 멈추지 않았어.
#1584월 9일, 리가 회담을 요청했지.
#159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의 윌머 매클린 집에서 두 장군이 만났어.
#160리는 단정한 회색 군복 차림이었고, 그랜트는 진흙 묻은 야전복을 입고 있었어. 며칠 동안 두통에 시달렸던 그랜트는 나중에, 리가 항복 논의를 위해 만나겠다는 편지를 읽자 두통이 사라졌다고 회고했지.
#161항복 조건은 비교적 관대했어. 남군 병사들은 가석방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봄 농사에 필요한 말과 노새도 가져갈 수 있게 했어.
#162리의 군대가 사실상 끝난 거야.
#163그리고 그 방에는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도 있었어. 전쟁 말기에 그랜트의 참모진에서 복무하고 있었거든.
#164링컨 자신은 그 방에 없었어.
#165대신 그의 아들이 리의 항복을 지켜보고 있었지.
#166애퍼매톡스에서 리가 항복했다고 그날 모든 남군이 동시에 무기를 내려놓은 건 아니었어. 수정헌법 제13조도 아직 최종 비준 전이었고, 노예제 이후 미국을 어떻게 다시 만들지도 남아 있었지.
#167그래도 워싱턴에서는 전쟁이 끝나간다는 분위기가 퍼졌어.
#1681865년 4월 14일 밤,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우리 미국인 사촌"이라는 희극을 보고 있었어.
#169남부연합을 지지하던 배우 존 윌크스 부스가 대통령석으로 들어와 링컨을 총으로 쐈어.
#170링컨은 다음 날 아침 죽었어.
#171리의 항복에서 닷새 뒤였지.
#172링컨의 시신은 워싱턴에서 스프링필드까지 장례 열차로 돌아갔어.
#173도시마다 사람들이 모였고, 철길 옆에도 추모객이 줄을 섰지.
#174그런데 열차에는 관이 하나 더 있었어.
#175윌리의 관이었어.
#176백악관에서 죽은 뒤 워싱턴에 묻혔던 아들을 아버지와 함께 스프링필드에 묻기 위해 다시 옮긴 거야.
#177몇 년 전 시카고 호텔에서 윌리가 쓴 편지에는 작은 침대가 자기 것, 큰 침대가 아버지 것이라고 적혀 있었어.
#178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열차를 타고 일리노이로 돌아갔어.
#179뒤에서 보면 모든 일이 예정돼 있던 길처럼 보이기도 해.
#1801858년 패배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였고, 남북전쟁은 위대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시험이었고, 그랜트는 링컨이 처음부터 찾던 장군이었던 것처럼 말이야.
#181실제로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았어.
#182링컨은 1858년에 정말 상원의원이 되고 싶었고, 졌어.
#183다만 그 패배에서 생긴 전국적 관심을 버리지 않았지.
#184대통령이 됐을 때는 대규모 전쟁을 어떻게 지휘할지 알지 못했어. 장군을 고르고, 실망하고, 바꾸면서 자신이 어떤 방식의 전쟁을 원하는지도 배워갔어.
#185그랜트도 처음부터 알아본 천재가 아니었어. 그랜트가 먼저 결과를 쌓았고, 링컨은 그걸 보고 더 큰 권한을 줬지.
#186노예제 문제에서도 링컨의 답은 처음부터 완성돼 있지 않았어.
#187노예 상태의 사람들이 움직였고, 의회와 군대가 움직였고, 흑인 공동체와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상황을 바꿨어.
#188링컨의 정책도 달라졌지.
#189모든 판단이 옳았던 건 아니야. 흑인을 미국 밖으로 이주시킨다는 식민 이주 구상처럼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선택도 있었고, 전쟁 뒤에도 흑인의 시민권과 투표권, 재건 문제는 그대로 남았어.
#190그래서 링컨의 이야기를 단순히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르면 중요한 부분이 빠져.
#191그가 계속 만난 건 단순한 실패만이 아니었어.
#192자기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현실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었지.
#193그럴 때 링컨은 같은 답을 더 세게 반복하기만 하지는 않았어.
#194사람을 바꾸고, 방법을 바꾸고, 정책을 바꾸고, 자기 판단도 바꿨어.
#195그러면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도 있었지.
#196남부가 떨어져 나간 채 나라가 영구히 갈라지는 것.
#197그리고 전쟁이 깊어질수록, 다시 합쳐질 연방이 노예제를 그대로 품은 예전의 연방으로 돌아가는 것.
#1981858년 링컨은 상원의원이 되려다 졌어.
#1997년 뒤 그의 아들은 로버트 E. 리가 항복하는 방에 서 있었지.
#200그 사이에 있었던 건 실패할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었어.
#201실패한 뒤에는 전과 같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이야기였어.
#2021864년 선거에서 링컨에게 맞선 사람은, 전쟁 초반 그가 직접 해임했던 이었어. 병사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북군 장군은 왜 2년 뒤 자기 옛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끌어내리려는 후보가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