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 위기와 긴 정체를 지나 20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은 미국 피겨스케이터
14살에 이미 챔피언이었던 앰버 글렌은 왜 다시 정상에 오르는 데 10년이 걸렸을까
#12024년 미국선수권 프리스케이팅. 24살 앰버 글렌은 첫 점프로 트리플 악셀을 뛰었어. 앞으로 세 바퀴 반을 도는, 여자 싱글에서는 성공하는 선수가 많지 않은 어려운 점프였지. 착지까지 해냈어.
#2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흔들리기 시작했어. 트리플 러츠로 뛰어야 할 점프가 더블이 됐고, 트리플 플립은 싱글이 됐지. 음악이 끝나자 글렌은 얼음 위에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어.
#3또 이런 순간에 무너졌다고 생각한 거야.
#4점수는 일단 1위였어. 하지만 마지막에는 전년도 챔피언 이사보 레비토가 남아 있었지. 글렌은 기다렸어.
#5그런데 레비토가 세 번 넘어졌어.
#6최종 결과가 떴어.
#7앰버 글렌, 미국 챔피언.
#8글렌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먼저 놀라움이 보였어. 시니어 미국선수권에 아홉 번 도전한 끝에 처음 얻은 우승이었거든.
#9그런데 이 장면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
#10글렌은 이미 10년 전에도 미국 챔피언이었어.
#112014년, 14살의 글렌은 미국 주니어 챔피언이 됐어.
#12사람들이 들뜰 만한 이유가 있었지. 그보다 앞서 주니어 챔피언이 된 그레이시 골드와 폴리나 에드먼즈는 바로 다음 시즌 시니어 미국선수권에서 2위를 했고, 둘 다 소치 올림픽에 나갔어.
#13그러니 글렌이 우승하자 비슷한 미래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어.
#14다음은 앰버 차례다.
#15어린 글렌에게는 꿈처럼 느껴질 일도 생겼어. 어릴 때 그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에서 사라 휴스가 금메달을 따는 영상을 DVD로 몇 번이고 봤거든. 그런데 주니어 챔피언이 되자 그 사라 휴스가 직접 축하 전화를 해온 거야.
#16모든 게 예정된 길처럼 보였어.
#17하지만 다음 시즌, 처음 출전한 시니어 미국선수권에서 글렌은 13위였어.
#18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위보다 훨씬 큰 문제가 생겼지.
#19글렌의 어린 시절은 거의 전부 피겨스케이팅을 중심으로 돌아갔어.
#20아버지 리처드는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초과근무를 했고, 병원이나 영화관 경비 같은 부업도 맡았어. 어머니 캐슬린은 링크에서 일했고, 레슨비를 아끼려고 코치 가족의 아이를 돌보기도 했지. 의상도 직접 만들었고 중고 스케이트와 장비도 찾아 썼어.
#21앰버는 훈련 때문에 홈스쿨링을 했어. 동생 브룩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과 평범한 학생 생활을 했지만, 앰버는 링크에 남았지.
#22브룩은 훗날 언니의 삶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어.
#23"피겨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
#24그런데 15살 무렵, 그 삶이 무너졌어.
#25글렌은 우울증과 불안, 섭식장애를 겪었고 정신건강 치료를 받게 됐어. 치료 시설에서 나와 첫 시니어 국제대회에도 출전했지만, 훗날 그 경기를 거의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지.
#26전문가들은 경쟁에서 물러나라고 권했어.
#27부모에게도 난감한 순간이었을 거야. 딸이 이 꿈을 계속 꿀 수 있게 오랫동안 생활을 바꿔왔는데, 이제는 그 딸을 지키려면 꿈에서 떼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 거니까.
#28글렌은 몇 달 동안 얼음을 떠났어.
#29그러다 다시 돌아왔어. 거창한 복귀 계획 때문은 아니었지.
#30그냥 스케이트가 다시 재미있을 수 있는지 보고 싶었어.
#31복귀한 뒤 글렌은 조금씩 올라갔어. 미국선수권에서 2017년 8위, 2018년에도 8위, 2019년 7위, 2020년 5위.
#32사라진 건 아니었어. 국제대회에도 나갔고 실력도 좋아지고 있었지.
#33그런데 14살 때 사람들이 예상했던 스타가 되어가는 모습도 아니었어.
#34이 시기 글렌에게 변하기 시작한 건 점수만이 아니었어. 링크에서 함께 훈련하던 티머시 르덕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는 퀴어 선수였고, 글렌은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봤어. 오랜 친구 애슐리 케인그리블에게는 자신이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기도 했지.
#352019년 글렌은 자신이 바이섹슈얼이자 팬섹슈얼이라고 공개했어.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무게를 안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고 했지.
#36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간단하게 풀리진 않아.
#37커밍아웃했다고 갑자기 챔피언이 된 건 아니거든.
#382020년 미국선수권은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뒤 처음 맞는 미국선수권이었어.
#39경기 전에 관중석을 봤더니 프라이드 깃발들이 보였어. 글렌은 거의 울 뻔했지.
#40그런데 그 대회에서 오래 남은 장면은 링크 밖에서 생겼어.
#41한 어린 팬이 어머니와 함께 글렌을 찾아왔어. 그 아이는 자신의 젠더 정체성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글렌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어머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용기를 냈다고 했어.
#42어머니도 글렌에게 고맙다고 했어. 딸이 그전까지 아주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43아이가 울었어. 어머니도 울었어. 글렌도 울었지.
#44호텔 로비에서 세 사람이 같이 울고 있었어.
#45그때 글렌에게는 시니어 미국 우승도, 세계선수권 메달도, 올림픽 출전 경력도 없었어.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이미 "나도 이렇게 존재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해준 선수였던 거야.
#46경기력도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어. 2020년에는 오랫동안 쫓아온 트리플 악셀을 훈련에서 착지했고, 2021년 미국선수권에서는 은메달까지 땄어.
#47드디어 긴 정체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
#48그런데 세계선수권 대표로는 뽑히지 못했어.
#49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더 큰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어.
#50올림픽이었어.
#512022년 미국선수권은 베이징 올림픽 대표 선발이 걸린 대회였어.
#52쇼트프로그램 당일, 글렌은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 그래도 경기가 시작되면 아드레날린이 올라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지.
#53안 됐어.
#54나중에 글렌은 마치 관중석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어.
#55쇼트 14위.
#56그리고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어. 프리스케이팅은 기권해야 했지.
#57올림픽 기회가 또 사라졌어.
#5814살 때는 금방이라도 올림피언이 될 것 같았던 선수가 22살이 되도록 아직 한 번도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 거야.
#59글렌은 이제 점프 하나, 프로그램 하나를 손보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느꼈어.
#60전부 바닥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어.
#61그래서 텍사스를 떠났어.
#622022년 봄, 글렌은 콜로라도스프링스로 옮겼어. 평생 살아온 텍사스와 부모 곁을 떠나 생활하는 건 처음이었지.
#63그곳에서 데이먼 앨런, 태미 갬빌과 훈련하기 시작했어. 글렌은 앨런에게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더 스케이트를 타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고 말했어.
#64그런데 함께 훈련해보니 앨런의 눈에 이상한 점이 보였어.
#65글렌은 이미 국제대회 경험이 많은 선수였고 어려운 점프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실제 경기처럼 프로그램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하는 훈련이 충분히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던 거야.
#66단순히 체력이 부족한 문제도 아니었어.
#67프로그램을 타는 동안 글렌의 머리는 몸보다 앞서 달려갔어. 지금 점프를 뛰면서 벌써 다음 점프를 생각하고, 방금 한 실수를 되짚고, 그 실수가 점수에 어떤 영향을 줄지까지 생각했지.
#68프리스케이팅 후반에 가면 몸보다 머리가 먼저 지쳐버릴 수 있었어.
#69그래서 훈련을 바꿨어. 실전처럼 프로그램 전체를 타는 연습을 늘렸고, 후반부에 부담이 몰리지 않도록 프로그램 구성도 손봤지.
#70예전에는 그냥 "큰 경기에서 무너진다"라고 보이던 문제가 조금씩 쪼개지기 시작했어.
#71그렇다고 바로 해결된 건 아니었어.
#722023년 스케이트 아메리카. 장소는 텍사스였어.
#73가족과 친구들이 관중석에 있었고, 글렌이 여섯 살 때 알던 선생님까지 찾아왔어.
#74프리스케이팅 첫 점프는 트리플 악셀이었어.
#75도약했어. 돌았어. 착지했어.
#76오랫동안 쫓아온 점프를 마침내 국제대회에서 깨끗하게 성공한 거야. 관중의 함성이 너무 커서 글렌은 음악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어.
#77이쯤이면 완벽한 우승 장면으로 이어질 것 같지.
#78그런데 아니었어.
#79이후 점프에서 실수가 나왔고, 최종 순위는 5위였어.
#80오히려 그래서 더 분명해졌어.
#81앰버 글렌에게 없었던 건 트리플 악셀이 아니었어.
#82어려운 점프를 뛸 능력은 이미 있었거든. 더 어려운 건 큰 성공 하나에도, 실수 하나에도 휩쓸리지 않고 몇 분짜리 프로그램 전체를 끝까지 가져가는 일이었어.
#83그다음이 바로 2024년 미국선수권이야.
#84글렌은 처음으로 시니어 미국 챔피언이 됐어. 하지만 처음 장면에서 봤듯 깔끔하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 우승은 아니었지.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고도 후반 점프에서 흔들렸고, 본인은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했어.
#85두 달 뒤 세계선수권에서는 10위였어.
#86그러니 "콜로라도로 옮기고 새 코치를 만나서 해결됐다"는 설명도 맞지 않았어.
#87글렌은 스포츠 심리 훈련을 계속했고, 2024년 봄부터는 뉴로테라피도 더했어. 본인이 설명한 목표 중 하나는 머리를 진정시키는 거였지.
#88이것 하나가 우승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는 없어.
#89대신 달라진 게 있었어. 예전에는 그냥 '압박감에 약하다'고 뭉뚱그렸던 문제를 훨씬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야.
#90실수한 직후 시선과 생각은 어디로 가는지. 흥분 상태는 어떻게 변하는지. 프로그램 어느 지점에서 집중이 흐트러지는지. 아직 오지도 않은 다음 순간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로 어떻게 돌아오는지.
#91그리고 2024년 후반, 결과가 달라지기 시작했어.
#92글렌은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우승했어. 이어 중국컵에서도 우승했고, 시즌 그랑프리 성적이 가장 좋은 선수들이 모이는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갔지.
#93쇼트프로그램은 1위. 트리플 악셀도 성공했어.
#94그런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 갈비뼈와 등에 통증이 있었고 프리스케이팅도 완벽하지 않았지. 예정했던 트리플 점프 하나가 더블이 됐고, 다른 점프의 착지도 흔들렸어.
#95예전 글렌에게는 익숙한 위험 신호였어.
#96실수 하나. 그 실수를 계속 생각해. 그러다 다음 요소까지 무너져.
#97이번에는 달랐어.
#98실수했어. 그다음을 했어. 또 그다음을 했어.
#99끝까지 탔어.
#100그리고 우승했어.
#101미국 여자 선수로는 2010년 이후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 정상에 오른 거야.
#102경기 뒤 글렌이 한 말도 흥미로웠어. 그 프리를 대단한 감정의 '공연'처럼 느끼지 않았다고 했거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기술을 하나씩 보여주는 데 가까웠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을 했다는 식이었지.
#103어쩌면 바로 그게 변화였어.
#104앰버 글렌은 완벽해진 게 아니었어.
#105계속할 수 있게 된 거야.
#106몇 경기만 잘 풀린 걸 수도 있었어.
#1072025년 미국선수권에서 글렌은 쇼트 3위였어. 프리에서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했지만 뒤에 트리플 루프에서 넘어졌지.
#108그런데 그 넘어짐이 나머지 프로그램까지 끌고 가지 않았어.
#109역전 우승. 미국선수권 2연패였어.
#1102025년 세계선수권에서는 더 거칠게 시험받았어. 쇼트 첫 트리플 악셀에서 넘어져 9위까지 내려갔거든.
#111프리에서 다시 트리플 악셀을 뛰었어.
#112이번에는 착지했어.
#113최종 5위까지 올라왔지.
#114그리고 2026년 미국선수권에서도 우승했어. 3연패였어.
#115주니어 챔피언에서 시니어 챔피언이 되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한번 정상에 올라선 뒤에는 세 시즌 연속 그 자리를 지킨 거야.
#116이번에는 올림픽 대표 명단에도 앰버 글렌의 이름이 있었어.
#117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올림픽. 앰버 글렌은 마침내 올림피언이 됐어.
#118미국 대표팀과 함께 단체전 금메달도 땄지.
#119그다음 여자 싱글 개인전이 시작됐어.
#120쇼트프로그램이 무너졌어.
#12113위.
#122이상하게 익숙한 숫자였어.
#1234년 전 올림픽 대표를 노리던 미국선수권에서는 쇼트 14위였고, 곧 코로나19 양성이 나와 프리를 타보지도 못했지.
#124이번에는 달랐어.
#125다음 경기가 남아 있었어.
#126글렌은 다시 얼음에 나왔고, 프리스케이팅을 탔어. 최종 순위는 5위까지 올라갔어.
#127개인전 올림픽 메달은 없었어. 완벽한 결말도 아니었지.
#128그래서 오히려 무엇이 달라졌는지가 잘 보여.
#129앰버 글렌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선수가 된 게 아니었어.
#130중요한 경기에서도 실수해. 압박도 받아. 집중도 흔들려.
#131달라진 건 그다음이었어.
#132넘어진 뒤 다음 점프를 뛰는 것. 나쁜 쇼트 뒤에 프리를 타는 것. 실패 한 번을 남은 경기 전체나 선수 인생 전체의 판결로 만들지 않는 것.
#133그걸 아주 오랫동안 배운 거야.
#134하나의 비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 커밍아웃 하나로 설명할 수도 없고, 트리플 악셀 하나도 아니야. 새 코치도, 뉴로테라피도 혼자서 답이 되지는 않아.
#135글렌은 몇 년에 걸쳐 자신을 숨기는 방식, 훈련하는 방식, 경기를 준비하는 방식, 압박 속에서 자기 머리가 움직이는 방식을 하나씩 바꿔갔어.
#136재능은 14살에도 있었어.
#137그 재능을 경기 끝까지 가지고 가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던 거야.
#138어린 앰버의 삶을 동생 브룩은 이렇게 기억했어.
#139피겨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
#140한때는 그 삶이 너무 무거워져서 스케이트 자체를 떠나야 했지.
#14126살의 글렌은 여전히 현역 선수야. 미국선수권 3연패 챔피언이고, 그랑프리 파이널 챔피언이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야.
#142그런데 2026년, 그는 "댄싱 위드 더 스타스"에도 출연하기로 했어.
#143파트너 파샤 파슈코프가 춤추는 모습을 본 글렌은 조금 무서웠다고 했어.
#144얼음 위에서는 이제 세계 정상급 선수야.
#145여기서는 다시 배워야 해.
#146처음부터.
#14714살의 앰버 글렌은 너무 일찍 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어떤 챔피언이 될지 먼저 정해버렸어. 그 기대에 짓눌릴 뻔했고, 실제 정상에 닿기까지는 10년이 더 걸렸지.
#148그리고 마침내 그 자리에 올라선 지금, 글렌이 선택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얼마나 잘하는지를 또 증명하는 일이 아니었어.
#149다시 초보자가 되는 일이었어.
#15014살의 앰버 글렌이 미국 주니어 챔피언이 됐을 때, 축하 전화를 건 사람은 였어.
#151그런데 휴스 자신도 올림픽에서 예상된 순서대로 우승한 선수는 아니었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더 강력한 우승 후보들이 따로 있던 상황에서, 16살 휴스가 마지막 프리스케이팅으로 금메달까지 올라갔거든.
#152어린 글렌은 바로 그 경기를 DVD로 몇 번이고 돌려봤어.
#153왜 하필 그 장면이었을까? </cont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