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이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남긴 작가
사라진 것들은 어떻게 나니아로 돌아왔을까
#11908년, 아홉 살 C. S.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라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 그 방에는 셰익스피어 달력이 걸려 있었는데, 하필 그날 페이지에는 "리어 왕"의 한 문장이 적혀 있었지. “Men must endure their going hence.”
#2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었어. 아버지 앨버트는 그 달력장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어.
#3어머니가 사라지자 루이스가 알던 집의 세계도 무너졌어. 얼마 뒤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십대가 되면서 어린 시절 믿었던 기독교에서도 멀어졌지.
#4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었어. 형 워니와는 말하는 동물들이 정치도 하고 전쟁도 벌이는 상상의 나라 Boxen을 만들었거든. 그리고 십대의 어느 순간, 머릿속에 또 하나의 장면이 들어왔어. 눈 덮인 숲. 우산과 소포를 든 파우누스.
#5그때는 나니아도 없었고, 이야기도 없었어.
#6그저 그 그림만 사라지지 않았지.
#7루이스는 옥스퍼드에 들어갔지만, 곧 제1차 세계대전이 그의 삶을 전쟁터로 끌고 갔어. 거기서 패디 무어라는 젊은 장교와 가까워졌지.
#8두 사람은 한 가지 약속을 했어.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살아남은 쪽이 상대의 가족을 돌보기로 한 거야.
#91918년 아라스에서 루이스가 부상을 입었어. 루이스는 살아서 돌아왔고, 패디는 그러지 못했지.
#10전쟁이 끝났다고 그 약속까지 끝난 건 아니었어. 패디의 어머니 제이니 무어와 여동생 모린 무어이 루이스의 삶 속으로 들어왔고, 전쟁터에서 한 말은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짜리 책임이 됐어. 루이스는 오랫동안 그들과 가족처럼 살았고, 제이니가 늙고 병든 뒤에도 곁을 지켰지.
#11그 무렵 루이스에게는 다른 꿈도 있었어. 시인이 되고 싶었던 거야. 1919년에는 Clive Hamilton이라는 필명으로 "Spirits in Bondage"를 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어. 오래 붙잡았던 "Dymer"도 1926년에 출간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
#12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먼저 성공한 건 자기 이야기를 쓰는 일이 아니었어. 루이스는 옥스퍼드에서 다른 사람들이 남긴 오래된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가 됐거든.
#13후세가 기억하는 이야기꾼은 아직 나오지 않은 셈이었어.
#14루이스는 기독교를 떠났지만 신화에는 계속 끌렸어. 1916년에는 조지 맥도널드의 판타지 "Phantastes"를 읽었는데, 훗날 그 작품이 자신의 상상력에 깊은 변화를 일으켰다고 회고했지.
#15그렇다고 곧바로 신앙이 돌아온 건 아니었어. 시간이 더 흘렀고, 옥스퍼드에서 오래된 언어와 신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학자를 만나게 돼. J. R. R. 톨킨이었어.
#16둘은 가까운 친구가 됐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었지. 톨킨은 기독교인이었고, 루이스는 아니었어.
#17루이스에게는 스스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어. 오래된 신화에서 죽음과 희생, 재생 같은 이야기를 만나면 마음이 움직였는데, 기독교가 비슷한 이야기를 말하면 믿기를 거부했거든.
#181929년에는 결국 무신론을 버리고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돼. 그래도 기독교까지 받아들인 건 아니었어.
#191931년 9월 어느 밤, 루이스는 톨킨과 휴고 다이슨과 함께 걸으며 신화와 기독교를 오래 이야기했어. 대화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지.
#20그날 밤 한 번으로 갑자기 사람이 바뀐 건 아니야. 변화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어. 다만 루이스가 따로 떼어놓았던 두 세계, 그러니까 신화를 사랑하는 상상력과 종교적 진실이라는 문제가 그 무렵부터 서로 맞닿기 시작한 거야.
#21얼마 뒤 루이스는 기독교인이 됐어.
#22어린 시절 버린 신앙이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온 건 아니었어. 책과 신화, 논쟁과 친구를 거쳐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 거지.
#23제2차 세계대전 무렵이면 루이스는 이미 옥스퍼드에서 자리 잡은 학자였어. 1941년에는 "The Screwtape Letters"가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 BBC 라디오에서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
#24그가 상대하던 사람은 대학 강의실의 학생들만이 아니었어. 전쟁 중 저녁에 라디오를 켠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도덕을 설명했거든. 그 방송 내용은 나중에 "Mere Christianity"로 이어졌어.
#25그러니까 나니아가 무명의 루이스를 갑자기 세상에 알려준 건 아니야. 그는 이미 학자였고, 기독교 저자로 알려져 있었고, 라디오를 통해 목소리까지 익숙한 사람이었지.
#26정작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 어린이 판타지 작가 루이스였어.
#271939년 무렵에도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거든.
#28눈 덮인 숲의 파우누스는 여전히 책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291948년 무렵 루이스는 다시 어린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 오래전부터 따로 흩어져 있던 그림들이 이번에는 하나의 세계로 모였지. 눈 덮인 숲. 우산을 든 파우누스. 말하는 동물들. 그리고 옷장 너머의 다른 세계.
#30그렇게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어.
#31루이스는 원고를 톨킨에게 보여줬어. 생각해보면 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지. 신화를 놓고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친구였고, 자기 역시 거대한 판타지 세계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32그런데 톨킨은 나니아를 좋아하지 않았어.
#33루이스의 세계에는 파우누스와 켄타우로스, 마녀, 말하는 동물, 서로 다른 신화에서 온 존재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있었어. 거기에 파더 크리스마스까지 등장했지. 언어와 역사와 전설을 차곡차곡 쌓아 하나의 일관된 세계를 만들던 톨킨과는 방식이 아주 달랐던 거야.
#34두 사람은 같은 신화를 사랑했지만, 판타지를 만드는 방법까지 같지는 않았어.
#35톨킨의 반응에 루이스도 흔들렸지. 그때 다른 친구 로저 랜슬린 그린이 원고를 읽었어.
#36그린은 계속 써보라고 했어.
#37그래서 루이스는 계속 썼지.
#38톨킨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던 건 아니었어. 자기 이야기를 끝내려던 거야.
#391950년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출간됐어. 루이스는 쉰한 살이었지.
#40젊은 시절에는 시인으로 성공하려 했고, 그다음에는 문학자가 됐고, 다시 기독교 저자로 이름을 알렸어. 그런데 가장 멀리까지 그의 이름을 데려갈 작품은 오십 대가 되어서야 시작된 셈이야.
#411950년부터 1956년까지 나니아 이야기는 일곱 권으로 늘어났어.
#42그런데 그 성공 속에도 한 번 실패했던 이야기가 숨어 있었어.
#43루이스는 첫 책이 나오기 전부터 나니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쓰려고 했거든. 그런데 이야기가 막혔어. 결국 한 번 손을 놨지.
#44아이디어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어.
#45몇 년 뒤 다시 돌아온 이야기가 "The Magician's Nephew"야. 나니아는 어떻게 생겼는지, 마녀는 어디서 왔는지, 숲 한가운데 가로등은 왜 있는지, 그리고 그 유명한 옷장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였어.
#46세상의 시작을 다룬 책인데 출간된 건 여섯 번째였어. 게다가 나니아 일곱 권 가운데 루이스가 완성하는 데 가장 오래 걸린 작품이었지.
#47문은 먼저 열렸어.
#48그 문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한참 뒤에야 쓰인 거야.
#49나니아를 쓰던 시기, 루이스의 삶에는 조이 데이비드먼이라는 미국인 작가가 들어왔어. 처음에는 편지를 주고받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지.
#501956년 두 사람은 민사 결혼을 했어. 처음에는 조이가 영국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돕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고.
#51그런데 조이에게 암이 발견됐어.
#52죽음이 갑자기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이상 실용적인 결혼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게 됐지. 루이스도 자신의 감정을 분명히 마주하게 됐고, 두 사람은 종교적인 결혼식을 올렸어.
#53그 뒤 예상 밖으로 조이의 상태가 좋아졌어. 두 사람에게 시간이 생긴 거야.
#54평생 독신의 옥스퍼드 학자처럼 살아온 루이스에게 결혼생활은 오십 대 후반에야 찾아왔어.
#55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지. 암이 다시 돌아왔거든.
#561960년 봄, 루이스와 조이는 친구들과 그리스를 여행했어. 루이스가 평생 책에서 읽고 가르쳐온 고전 세계를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걸은 거야.
#57그해 7월 13일, 조이는 세상을 떠났어.
#58루이스는 이미 고통에 관한 책을 쓴 적이 있었어. "The Problem of Pain".
#59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그는 그 질문을 생각하고 설명했지.
#60그런데 조이가 죽고 나니 질문의 자리가 달라졌어. 이제 고통은 책상 건너편의 문제가 아니었어.
#61자기 집 안에 있었지.
#62루이스는 슬픔을 기록하기 시작했어. 믿음도 흔들렸고, 신을 향한 분노도 나왔어. 심지어 자신의 기억까지 의심했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조이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서 만든 ‘조이의 이미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했어.
#63상상으로 하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상상력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버릴 수도 있다는 걸 두려워하게 된 거야.
#64그 기록은 "A Grief Observed"라는 책이 됐어.
#65그런데 표지에는 C. S. Lewis라는 이름이 없었어. 저자는 N. W. Clerk였지.
#66첫 시집을 Clive Hamilton이라는 이름으로 냈던 사람이, 삶에서 가장 개인적인 책에서도 다시 자기 이름을 숨긴 거야.
#67조이가 죽은 뒤에도 루이스의 가족 역할은 끝나지 않았어. 조이의 두 아들을 이미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던 그는 더글러스 그레셤과 데이비드를 계속 돌봤지.
#68젊은 시절에는 전쟁에서 죽은 친구가 남긴 가족과 살았어. 말년에는 죽은 아내가 남긴 아이들의 아버지로 남았고.
#69두 사건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야.
#70그런데 누군가 사라진 뒤, 남겨진 사람들과 계속 살아갔다는 점은 묘하게 반복됐어.
#71조이가 죽은 뒤 루이스의 건강도 빠르게 나빠졌어. 그래도 그는 기도와 문학, 언어와 중세의 세계관에 대해 계속 썼지. 결국 1963년에는 건강 문제로 케임브리지 교수직을 내려놓게 됐어.
#72그해 11월 22일, 루이스는 옥스퍼드의 집 The Kilns에서 세상을 떠났어.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때였지.
#73그런데 그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암살됐어. 올더스 헉슬리도 같은 날 죽었고.
#74세계의 시선은 다른 죽음을 향했어.
#75루이스 자신도 자기 이름이 아주 먼 미래까지 계속 남을 거라고 확신한 사람은 아니었어.
#76어머니가 떠났고, 패디가 떠났고, 조이가 떠났어.
#77이제 루이스도 떠난 거지.
#78루이스가 죽은 뒤 형 워니는 묘비에 새길 문장을 골랐어. “Men must endure their going hence.”
#79처음 보는 문장이 아니었지.
#8055년 전, 어머니 플로라가 죽던 방에 걸려 있던 셰익스피어 달력. 아버지가 버리지 않고 보관했던 그날 페이지의 문장이었어.
#81어머니가 떠나던 날의 말이 아들의 무덤으로 돌아온 거야.
#82그래도 루이스와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었어. 그의 책은 계속 읽혔고, The Kilns에는 사람들이 찾아왔어. 조이의 아들이자 루이스가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던 더글러스 그레셤은 훗날 나니아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게 됐지.
#83그리고 시간이 더 흘렀어.
#842027년에는 새로운 나니아 영화가 관객을 만나게 돼. 그런데 첫 작품은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아니야.
#85"The Magician's Nephew"야.
#86루이스가 나니아의 시작을 쓰려다 한 번 막혀서 내려놓았던 이야기. 몇 년 뒤 다시 돌아와 여섯 번째 책으로 출간했고, 일곱 권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했던 이야기지.
#87루이스에게는 가장 늦게 완성된 ‘시작’이었어.
#88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훨씬 지난 뒤, 그 시작이 다시 첫 번째 이야기가 되는 거야.
#89전쟁에서 죽은 패디 무어에게는 여동생 모린이 있었어. 수십 년 뒤, 루이스가 병원에서 사람들을 알아보는 일조차 어려워질 만큼 쇠약해졌을 때 모린이 찾아왔지.
#90그 사이 모린의 삶에는 꽤 뜻밖의 변화가 생겼어. 작위를 물려받아 가 된 거야.
#91루이스는 그녀를 알아봤어. 어떻게 그 사실까지 기억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런 동화 같은 일을 어떻게 잊겠느냐는 취지로 농담을 했다고 전해져.
#92전쟁터에서 맺어진 가족의 인연이 몇십 년을 돌아, 판타지 작가의 말년에는 정말 동화 같은 장면 하나를 남긴 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