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 직전 살아남고 시베리아 감옥과 반복되는 도박을 지나 인간이 스스로를 설득하고 무너지는 마음을 파고든 러시아 소설가
총살 직전 살아난 도스토옙스키는 어떻게 "죄와 벌"을 쓰게 됐을까?
#11849년 12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놉스키 광장이었어. 사형선고가 낭독됐고, 첫 번째 세 명이 처형용 기둥에 묶였지.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다음 차례였어.
#2그는 이게 연출이라는 걸 몰랐어. 정말 곧 총에 맞아 죽는다고 믿었지. 그러자 남은 몇 분이 갑자기 아주 길게 느껴졌어. 지나온 삶을 생각했고,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세상을 바라봤어. 만약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을 것 같았지.
#3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명령이 도착했어.
#4사형은 집행되지 않았어.
#5감형 자체는 이미 정해져 있었어. 다만 죄수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죽음이 바로 앞에 있다고 믿게 한 뒤에야 살려준 모의 처형이었지.
#6그날 도스토옙스키는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썼어. 조금 전까지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이 이제는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지. 지나간 시간을 아까워했고, 새로 받은 삶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드러냈어.
#7그럼 이제부터는 달라졌을까?
#8그랬다면 이야기가 훨씬 단순했을 거야.
#9사형이 취소됐다고 풀려난 건 아니었어.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로 보내졌고, 옴스크의 감옥에서 4년 동안 강제노동을 해야 했지.
#10가는 길에는 토볼스크를 거쳤어. 그곳에서 1825년 러시아 황제에 맞서 봉기를 벌였던 데카브리스트들과 연결된 여성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신약성서 한 권도 받았어. 감옥에서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책이었지.
#11그런데 옴스크에 도착하자 책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봐야 했어.
#12살인자도 있었고 강도도 있었어. 심한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과 같은 막사에서 먹고 자야 했지.
#13정치범이자 귀족 출신이었던 도스토옙스키가 그들과 곧바로 가까워진 것도 아니야. 일반 죄수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스토옙스키 역시 그들의 술과 폭력, 거친 행동에 질릴 때가 있었어.
#14그런데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사람들을 보니까 이상한 일이 생겼어.
#15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남자가 다른 순간에는 뜻밖의 다정함을 보였고, 거칠게 욕하던 죄수가 가족을 그리워했어. 자기 죄를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다른 후회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
#16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있었어.
#17그런데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까지 설명되지는 않았어.
#18훨씬 뒤에 도스토옙스키는 옴스크에서 떠올랐던 한 기억을 글로 남겼어.
#19부활절 무렵이었지.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죄수들을 보면서 그는 강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어.
#20그 순간 어린 시절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고 해.
#21아홉 살쯤이던 표도르가 들판에서 놀다가 늑대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겁에 질린 아이는 농노였던 마레이에게 달려갔지.
#22마레이는 아이를 비웃지 않았어. 괜찮다고 달래고, 안심할 때까지 다정하게 대해줬어.
#23감옥에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머릿속에 그 얼굴이 다시 나타났어. 그러자 눈앞에서 욕하고 술을 마시는 죄수들도 한 가지 얼굴로만 보기는 어려워졌지. 지금은 거칠어 보이는 이 사람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마레이 같은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을지 모르는 거야.
#24이 이야기는 그날 감옥에서 쓴 일기가 아니야. 도스토옙스키가 1876년에 발표한 "농부 마레이"라는 회고적 글에 나온 이야기야.
#25그래도 그가 시베리아에서 발견했다고 기억한 문제는 꽤 선명해.
#26한 사람 안에는 서로 잘 맞지 않는 모습들이 같이 들어 있었어.
#27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뒤, 도스토옙스키는 그 복잡함을 자기 자신에게서도 보게 돼.
#28강제노동이 끝난 뒤에도 그는 시베리아에서 군 복무를 해야 했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돌아온 건 1859년이었지.
#29그리고 다시 성공했어. 감옥 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음의 집의 기록"이 주목받았고, 형 미하일과 함께 만든 잡지 "브레먀"도 성장했어.
#30사형수였던 작가가 돌아와 다시 이름을 얻은 거야.
#31그런데 1863년, 당국이 "브레먀"의 발행을 금지했어. 형제는 "에포하"라는 잡지로 다시 시작했지만 형편은 좋지 않았지.
#32그리고 1864년에 가까운 사람 둘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어.
#33먼저 첫 아내 마리아가 죽었어. 몇 달 뒤에는 형 미하일까지 세상을 떠났지.
#34미하일은 단순히 가족이 아니었어. 어릴 때 함께 책을 읽던 형이었고, 이제는 출판 일을 같이 하던 동료이기도 했어. 그가 죽자 형의 가족과 출판사업에 얽힌 경제적 부담도 도스토옙스키에게 무겁게 남았지.
#35돈은 부족했고, 잡지는 흔들렸고, 빚은 늘어갔어.
#36그런데 그때 이미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습관이 하나 있었어.
#37룰렛이었어.
#38도스토옙스키는 형이 죽기 전인 1863년부터 유럽의 카지노에서 룰렛을 하고 있었어.
#39처음에는 이겼어.
#40그게 오히려 문제였지.
#41자기에게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거든.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면 된다.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어.
#42그런데 실제로 돈을 따면 조금만 더 하고 싶어졌어. 그러다 잃었지. 그러면 이번에는 잃은 돈만 되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또 걸었어. 더 잃었지.
#43시계까지 전당포에 맡기게 됐어.
#44이 장면이 묘한 건 1849년의 그 광장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45죽음을 기다리던 도스토옙스키는 몇 분의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절실하게 느꼈어. 그런데 살아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자기 시간과 돈을 계속 룰렛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지.
#46그가 아무것도 몰랐던 것도 아니야.
#47왜 무너지는지 스스로 꽤 잘 설명할 수 있었어.
#48그런데 알고 있다는 게 멈출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어.
#491865년, 독일의 비스바덴이었어. 도스토옙스키는 또 도박으로 돈을 잃었고 당장 돈이 필요했어.
#50그때 편집자 미하일 카트코프에게 새 작품을 제안했어.
#51가난한 젊은 남자가 당시 세상에 떠돌던 어떤 생각에 영향을 받아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였지.
#52이 구상이 나중에 "죄와 벌"이 돼.
#53그렇다고 도박 빚 때문에 "죄와 벌"을 생각해냈다고 보면 너무 빨라. 돈은 분명 그를 급하게 몰아붙였어. 하지만 작품 속 질문들은 훨씬 전부터 쌓이고 있었거든.
#54죽기 직전의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할까. 범죄를 안다고 그 범죄자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왜 자기에게 해로운 행동을 하면서도 계속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까.
#55도스토옙스키는 1864년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도 인간이 언제나 자기 이익에 맞게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생각을 흔들고 있었어.
#56그리고 자기 삶에서는 룰렛 앞에 설 때마다 또 다른 논리를 만들고 있었지.
#57이번에는 냉정할 수 있다. 이번에는 잃은 돈만 찾으면 된다. 이번에는 방법을 알아냈다.
#58"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 역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자기 논리를 만들어.
#59라스콜니코프는 단순히 가난해서 사람을 죽이는 인물이 아니야.
#60그에게는 이론이 있어.
#61역사를 바꾸는 비범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규칙에 묶여야 할까? 더 큰 목적을 위해 어떤 선을 넘는 것이 허용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62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생겨.
#63자기는 어느 쪽일까?
#64평범한 사람일까. 아니면 선을 넘어도 되는 사람일까.
#65그는 살인으로 그걸 시험하려고 해.
#66그런데 현실의 살인은 머릿속 이론처럼 움직이지 않아. 계획이 틀어지고,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타나고, 두 번째 살인까지 벌어져.
#67그리고 범죄가 끝난 다음에도 가장 큰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어.
#68라스콜니코프 자신이야.
#69그는 자기 행동을 허용하는 논리는 만들었어. 하지만 그 논리만으로 자기 자신을 견딜 수는 없었지.
#70도스토옙스키의 도박과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이 같은 건 아니야. 라스콜니코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자화상이라는 뜻도 아니고.
#71다만 둘 다 한 가지 문제를 보여줘.
#72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꽤 잘 설득할 수 있어.
#73현실까지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니야.
#74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 "죄와 벌"이 나온 건 아니야.
#75초기 구상은 더 짧았고, 범죄자가 자기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1인칭 고백에 가까웠어.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상당 부분을 써놓은 상태였지.
#76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았어.
#77문제는 바로 그때 돈이 정말 급했다는 거야. 빨리 완성해서 원고료를 받아야 했어.
#78그래도 이미 쓴 원고를 버렸어.
#79그리고 다시 시작했지.
#80시점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커졌어. 라스콜니코프 주변의 사람들도 더 중요해졌고.
#81돈 때문에 써야 했어.
#82하지만 돈이 급하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를 그냥 밀어붙이지는 않았던 거야.
#831866년 "죄와 벌"의 연재가 시작됐고 반응도 컸어.
#84도스토옙스키는 다시 성공하고 있었지.
#85그런데 바로 그때, 다른 계약 하나가 그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었어.
#86도스토옙스키는 출판업자 표도르 스텔롭스키와 아주 불리한 계약을 맺어둔 상태였어.
#87정해진 날짜까지 새 작품을 넘기지 못하면 앞으로 쓸 작품의 권리까지 크게 불리해질 수 있었지.
#88그런데 "죄와 벌"을 쓰느라 계약용 원고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어.
#89남은 시간은 약 한 달.
#90그래서 젊은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를 고용했어.
#91도스토옙스키가 말하면 안나가 속기로 받아 적었고, 집에서 원고를 정리한 다음 다음 날 다시 와서 이어갔어.
#92그렇게 서둘러 완성한 작품이 "도박사"였어.
#93상황만 놓고 보면 꽤 묘하지.
#94도박으로 돈을 잃은 작가가 도박에 빠진 남자의 소설을 돈 때문에 맺은 위험한 계약에서 벗어나려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받아쓰고 있었던 거야.
#95원고는 기한 안에 끝났어.
#96그리고 마감을 해결하려고 들어온 안나는 그 뒤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삶에 남게 돼.
#97작업이 끝나면 안나가 매일 찾아올 이유도 사라져.
#98도스토옙스키는 어느 날 새 소설을 생각하고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어.
#99나이가 많고 병든 예술가가 있는데, 그 남자가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였어. 그런 젊은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느냐고 물었지.
#100안나는 그럴 수 있다고 했어.
#101그제야 질문이 조금 달라졌어.
#102그 남자가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면? 그리고 그 젊은 여자가 안나라면?
#103안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답했어.
#104두 사람은 1867년에 결혼했지.
#105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잘 정리되는 이야기야. 죽음에서 살아난 작가가 걸작을 쓰고, 힘든 마감을 함께한 사람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는 거니까.
#106그런데 결혼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룰렛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어.
#1071867년 5월, 도스토옙스키는 안나를 두고 독일 홈부르크에서 도박을 했어.
#108이번에도 처음에는 자기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109그러다 돈을 잃었어. 더 했어. 또 잃었어.
#110마지막에는 돌아갈 여비까지 없어졌어.
#111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편지를 보내 돈을 부탁했어.
#112안나는 돈을 보냈지.
#113그런데 그는 그 돈도 잃었어.
#114도스토옙스키가 걱정한 건 돈만이 아니었어. 안나가 자신을 이제 어떻게 볼지 두려워했지. 자신을 여전히 존중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도 편지에 드러나.
#115그러면서 다시 돈을 부탁해야 했어.
#116그해에는 결혼반지와 겨울 외투까지 전당포에 맡겼어.
#117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또 룰렛으로 돌아갔지.
#118"도박사"를 쓴 사람은 도박이 사람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몰랐던 사람이 아니야.
#119자기 편지만 봐도 그 과정을 거의 한 단계씩 알아보고 있었어.
#120그런데 이해와 통제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거리가 있었어.
#1211871년,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비스바덴의 카지노에 들어갔어.
#122처음부터 돈을 걸지는 않았어. 룰렛을 보면서 머릿속으로만 어디에 걸지 생각해봤지.
#123그런데 예상이 계속 맞는다고 느꼈어.
#124심지어 0도 맞혔다고 생각했어.
#125그러자 오래된 믿음이 또 살아났지.
#126이번에는 정말 방법을 알아낸 것 아닐까?
#127실제 돈을 걸기 시작했어.
#128처음에는 땄어.
#129그리고 다시 잃었지.
#130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또 편지를 썼어. 이번에는 정말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고 했지.
#131안나가 바로 믿기 어려웠을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비슷한 약속을 이미 여러 번 들었으니까.
#132그런데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어.
#133도스토옙스키는 그 뒤로 룰렛을 하지 않았어.
#134왜 하필 이번에 멈췄는지는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 어려워. 안나의 사랑이 갑자기 그를 고쳤다고 말할 수도 없어. 안나는 그 전부터 같은 약속이 무너지는 걸 보고 있었거든.
#135다만 이번에는 반복이 끝났어.
#136도박이 끝난 뒤 안나의 역할은 더 커졌어. 원고를 받아쓰는 데서 끝난 게 아니라 집안의 돈과 빚을 관리했고, 책을 직접 출판하고 판매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지.
#137두 사람의 형편은 조금씩 안정됐어.
#138도스토옙스키는 계속 작품을 썼어. "백치", "악령", 그리고 마지막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갔지.
#1391880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푸시킨 기념 행사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섰어. 31년 전 국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믿게 했던 정치범이 이제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거야.
#140그런데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그 연설보다 더 오래전의 장소가 다시 나와.
#141"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이론만으로 자신을 구하지 못해.
#142결국 자백하고,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보내져.
#143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사형장에서 살아난 뒤 끌려갔던 바로 그곳이야.
#144그곳에서 그는 범죄자들과 먹고 자면서, 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는 걸 보게 됐어.
#145그리고 17년 뒤, 자기가 만든 살인자도 그곳으로 보냈지.
#1461849년 도스토옙스키에게 두 번째 삶이 주어지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했어.
#147그 삶을 살아가는 데는 훨씬 더 오래 걸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