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선수의 꿈이 끝난 뒤 Vogue와 Ralph Lauren을 거쳐 세계적인 웨딩 디자이너가 된 베라 왕
올림픽에 못 간 베라 왕의 옷은 어떻게 먼저 올림픽에 갔을까
#1열아홉 살의 베라 왕에게는 다음 계획이 없었어.
#2피겨스케이팅은 취미가 아니었거든. 여덟 살 무렵부터 얼음 위에서 살다시피 했고, 여름이면 하루 열 시간 가까이 훈련할 때도 있었어. 목표는 하나였지. 올림픽.
#31968년, 왕은 파트너 제임스 스튜어트와 미국 선수권 주니어 페어에서 5위를 했어. 올림픽 대표팀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했지. 싱글을 접고 페어에 남았으니, 아직 선수 인생이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야.
#4그런데 이듬해 스튜어트가 자기 싱글 경력에 집중하겠다고 했어.
#5왕에게는 새 파트너를 찾아 다시 맞춰갈 시간도, 싱글로 제대로 돌아갈 시간도 거의 없었어. 훗날 왕은 자신의 피겨 경력이 말 그대로 하루 만에 끝났다고 기억했지.
#6더 어려운 건 그다음이었어.
#7새 꿈이 없었거든.
#8대학을 중단했고 몇 년 동안 방향을 잃었어. 나중에는 그 시절이 우울증과 정신적인 붕괴에 가까웠다고 돌아봤지.
#9올림픽에 못 갔으니 바로 패션을 택했다?
#10그렇게 깔끔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11처음에는 그냥, 평생 하던 일이 사라진 거야.
#12이상하게도 다음 길을 열어준 쪽에도 피겨가 있었어.
#13파리에서 지내던 시절 왕은 프랑스 피겨선수 파트리크 페라와 교제했어. 그 인연을 통해 패션계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중에는 프랑스판 Vogue에서 일하던 나탈리 들라누아도 있었지.
#14왕은 그녀가 촬영을 준비하고, 옷과 사람을 고르고,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어.
#15이런 직업도 있구나.
#16왕의 눈에는 그 일이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어.
#17패션 자체는 어릴 때부터 익숙했어. 어머니 플로렌스는 Givenchy나 이브 생로랑 같은 프랑스 패션을 좋아했고 어린 딸을 파리의 쇼에도 데려갔거든.
#18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거기서 자기 직업을 발견하는 건 다른 문제였지.
#19왕은 결국 대학으로 돌아가 미술사를 공부하고 졸업했어. 그리고 뉴욕의 Yves Saint Laurent 매장에서 일하다 Vogue 패션 디렉터 프랜시스 패티키 스타인의 눈에 띄었지.
#20졸업하면 찾아오라는 말을 들었고, 왕은 정말 Vogue에 들어갔어.
#21그런데 첫날부터 제대로 한 번 걸렸어.
#22파리에서 돌아온 왕은 Yves Saint Laurent 셔츠드레스에 플랫폼 슈즈를 신고 손톱까지 빨갛게 칠해서 출근했어. 패션 잡지니까 멋지게 입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지.
#23선배 에디터 폴리 멜런의 반응은 간단했어.
#24집에 가서 갈아입고 오라고 했어.
#25촬영장을 뛰어다닐 사람이 입을 옷이 아니라는 거였지.
#26왕은 집에 갔다가 청바지와 운동화, 티셔츠 차림으로 다시 돌아왔어.
#27얼음 위에서는 수년을 훈련한 선수였지만, 여기서는 또 첫날이었어.
#28왕은 Vogue에서 빠르게 성장했어.
#29사진가 리처드 애버던은 젊은 왕에게 더 중요한 촬영을 맡겨야 한다며 힘을 실어준 사람이었어. 하지만 그 시절이 늘 우아했던 건 아니야.
#30한 번은 촬영에 필요한 모자를 빠뜨렸어.
#31폴리 멜런은 화가 났고, 왕은 촬영 밴에서 내려야 했어.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지.
#32문제는 돈도 없었다는 거야.
#33왕은 근처에 있던 다른 잡지 촬영팀을 찾아가 사무실로 돌아갈 돈을 빌렸어. 장소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근처였어.
#34훗날 왕은 세계적인 스타들에게 드레스를 입혀 Met Gala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게 돼.
#35그런데 그 계단을 볼 때면, 젊은 시절 모자 하나를 빠뜨려 비 오는 길에 내려졌던 날도 떠올랐다고 해.
#36왕은 Vogue에서 16년 넘게 일했어. 수없이 많은 옷을 보고, 사진가와 모델과 디자이너를 만나고, 패션이 어떻게 이미지가 되는지 배웠지.
#37언젠가는 편집장이 되고 싶었어.
#38그 자리는 오지 않았어.
#39그렇다고 Vogue 생활이 실패였던 건 아니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운 곳이었지.
#40그래서 1987년 왕은 익숙한 편집자의 세계를 떠나 랄프 로렌으로 갔어.
#41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만든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42직접 만드는 쪽으로 간 거야.
#43랄프 로렌에서 왕은 실제 제품 디자인을 배웠어.
#44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한 여성이 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걸 봤지.
#45자기가 작업한 제품이었어.
#46왕은 그걸 보고 정말 기뻤다고 회상했어.
#47Vogue에서도 패션을 만들긴 했지만 방식이 달랐거든. 거기서는 이미 존재하는 옷으로 사진과 이미지를 만들었어. 이제는 자기가 만든 물건을 모르는 누군가가 실제로 들고 다니고 있었지.
#48그런데 왕이 곧바로 "이제 내 회사를 만들자"며 랄프 로렌을 뛰쳐나온 건 아니야.
#49결혼과 가족 문제도 있었어.
#50그리고 1989년, 오랫동안 사귀어온 아서 베커와 결혼을 준비하다가 뜻밖의 문제를 만났지.
#51입고 싶은 웨딩드레스가 없었어.
#52패션계에서 거의 20년을 보낸 사람인데도 그랬어.
#53당시 왕이 본 웨딩드레스는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전통적으로 느껴졌어. 평소 패션계에서 보던 옷과 결혼식에서 살 수 있는 옷 사이에 묘한 간격이 있었던 거야.
#54결국 왕은 자기 드레스를 직접 스케치했어. 재봉사에게 맡겨 약 1만 달러짜리 맞춤 드레스를 만들었지.
#55그렇다고 결혼식장에서 갑자기 세계적인 브랜드 구상이 완성된 건 아니었어.
#56다음에 움직인 사람은 따로 있었거든.
#57젊은 왕이 패션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했을 때 아버지 청칭 왕은 선뜻 돈을 대주지 않았어.
#58정말 패션을 하고 싶다면 먼저 업계에 취직해서 직접 일해보라는 쪽이었지. 해보고도 좋으면 그때 알 수 있다는 거야.
#59왕은 정말 그렇게 했어.
#60Vogue에서 16년 넘게 일했고, 랄프 로렌에서도 일했어.
#61그리고 거의 마흔이 됐지.
#62이번에는 아버지가 먼저 웨딩 사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
#63투자금은 약 400만 달러였어.
#641990년, 왕은 뉴욕 칼라일 호텔에 첫 웨딩 매장을 열었어.
#65그런데 처음부터 지금의 Vera Wang 매장 같은 모습은 아니었어. 자기 이름의 드레스만 판 것도 아니고 다른 유명 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도 함께 팔았지.
#66왕은 패션을 알았어.
#67하지만 웨딩 사업은 또 처음이었어.
#68매장이 완성되기 전에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드레스를 팔기도 했어.
#69마흔 살에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70또 초보자가 된 거야.
#71그리고 400만 달러가 성공을 보장한 것도 아니었어. 1994년이 됐는데도 회사는 아직 이익을 내지 못했고 아버지의 투자금도 갚지 못했지.
#72훗날 Vera Wang이 웨딩드레스의 대명사처럼 될 거라는 결과를 지워놓고 보면,
#73그때는 이 회사가 살아남을지도 확실하지 않았어.
#74왕은 웨딩에만 머물고 싶지 않았어.
#75이브닝드레스도 만들고 싶었지.
#76그런데 큰 패션쇼를 열 돈이 없었어.
#77그래서 방법을 바꿨어.
#78수십 벌을 만들어 런웨이를 열 돈은 없어도,
#79한 사람에게 입힐 한 벌은 만들 수 있었거든.
#80그 한 사람이 샤론 스톤이었어.
#81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톤은 Vera Wang의 샴페인빛 볼가운을 입었어. 카메라는 긴 트레인을 잡았지.
#82그날 한 번으로 회사가 갑자기 성공한 건 아니야.
#83하지만 왕은 훗날 그 밤이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정의한 순간이었다고 돌아봤어.
#84생각해보면 이 방식도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지.
#85Vogue에서 16년 동안 배운 게 있었으니까.
#86옷만 중요한 게 아니었어.
#87누가 입는지, 어디서 입는지, 그리고 어떤 이미지로 남는지도 중요했어.
#88큰 쇼를 열 수 없었던 작은 회사는 한 장면에 집중했어.
#89이후 더 많은 배우들이 Vera Wang을 입기 시작했지.
#90그런데 샤론 스톤보다 먼저 왕의 옷이 도착한 더 이상한 무대가 하나 있었어.
#91올림픽이야.
#921992년, 첫 매장을 연 지 고작 2년쯤 됐을 때였어.
#93피겨선수 낸시 케리건 측에서 연락이 왔어.
#94올림픽에서 입을 의상을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이었지.
#95왕에게 경쟁 피겨는 이미 20년도 전에 끝난 일이었어.
#96그런데 이번에는 디자이너로 다시 얼음 앞에 서게 된 거야.
#97케리건은 왕이 만든 두 벌의 의상을 알베르빌 올림픽에 가져갔어.
#98왕이 선수로는 도착하지 못했던 무대에,
#99그녀가 만든 옷이 먼저 도착했어.
#100첫 시도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야.
#101케리건은 훗날 초기 의상 하나가 충분히 늘어나지 않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고 말했어.
#102웨딩드레스와 피겨 의상은 완전히 다르거든.
#103예쁘기만 하면 안 돼. 팔이 끝까지 뻗어야 하고, 점프해야 하고, 빠르게 회전해야 해. 그 모든 걸 방해하지 않으면서 음악과 안무의 일부처럼 보여야 하지.
#104그런데 이건 왕이 아주 오래전에 몸으로 배운 문제이기도 했어.
#105자신이 그 옷 안에서 움직이던 선수였으니까.
#106케리건과의 작업은 이어졌어. 19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도 왕은 그녀의 의상을 만들었지.
#107그 뒤로 미셸 콴, 에번 라이서첵, 네이선 첸 같은 정상급 선수들도 Vera Wang을 입고 올림픽 얼음 위에 섰어.
#108어릴 때의 피겨는 사라진 경력이 아니었던 거야.
#109움직이는 몸의 선을 보는 법. 빠른 속도에서 옷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감각. 조금 불편한 옷이 선수에게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 아는 경험.
#110첫 번째 인생에서 배운 것들이 두 번째 인생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했어.
#1112009년, 베라 왕은 미국 피겨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어.
#112올림픽 메달을 따서가 아니야.
#113선수 시절 이루지 못한 기록이 뒤늦게 바뀐 것도 아니고.
#114피겨 의상과 스포츠에 기여한 디자이너로 돌아온 거야.
#115그런데 이 연결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어.
#116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서 왕은 아이스댄서 매디슨 초크와 함께 피겨와 패션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앉았어.
#117초크도 직접 경기 의상을 디자인하는 선수야.
#118그녀가 어린 시절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장면 가운데 하나에는 미셸 콴이 있었어.
#119올림픽에서 Vera Wang 의상을 입고 스케이트를 타던 미셸 콴.
#120한때 올림픽에 가고 싶었던 소녀가 있었어. 그 소녀는 대표팀에 들지 못했지.
#121수십 년 뒤 다른 소녀가 그녀의 옷을 입고 올림픽에서 스케이트를 탔어.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소녀가 자라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고, 직접 의상도 만들기 시작했지.
#122그리고 2026년, 왕과 초크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어.
#123왕이 피겨선수로 돌아간 건 아니야.
#124끝난 줄 알았던 피겨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따라온 거지.
#125Vera Wang의 첫 매장이 열린 건 1990년이었어.
#12635년 뒤인 2025년, 왕은 자기 이름을 단 브랜드의 지식재산권을 WHP Global에 넘겼어.
#127브랜드를 팔았으니 은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
#128그런데 왕은 떠나지 않았어.
#129Founder이자 Chief Creative Officer로 남아 브랜드의 창작 방향을 계속 맡았고, WHP Global의 주주도 됐어.
#130이유는 꽤 현실적이었어.
#131독립회사 Vera Wang만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 각지의 확장을 모두 감당하기 어려웠거든. 더 큰 조직이 가진 자본과 현지 인력이 필요했어.
#132일흔다섯이 넘은 창업자가 다시 한번,
#133자기에게 없는 것을 인정하고 그걸 가진 곳으로 들어간 거야.
#134그리고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할 때 왕은 오래전 자기 아버지가 했던 말과 묘하게 닮은 이야기를 했어.
#135먼저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해보라고. 돈을 받으면서 배우라고. 그러고 나서 어떤 기회가 보이는지 보라고.
#136젊은 왕은 그렇게 Vogue에 들어갔어. Vogue를 떠나 랄프 로렌에서 다시 배웠고, 마흔에는 웨딩 사업을 처음부터 배웠어. 20년도 전에 끝난 피겨는 의상 디자인에서 다시 배워야 할 세계가 됐지.
#137그리고 일흔다섯이 넘어서도 또 자기에게 없는 걸 가진 조직 안으로 들어갔어.
#138왕은 35년 사업을 한 번의 대단한 도약으로 설명하지 않았어.
#139벽돌 하나씩. 신부 한 명씩.
#140그렇게 쌓았다고 했지.
#141열아홉 살의 베라 왕은 첫 번째 인생이 하루 만에 끝났다고 생각했어.
#142그런데 아주 오래 지나고 보니,
#143그때까지 배운 것들은 하나도 같이 끝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