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을 살아남아 다시 태어나는 판타지 라이프 MMORPG
스물두 살짜리 게임이 다시 알파 테스트를 시작한다
#12026년 9월, 조금 이상한 알파 테스트가 시작된다. 보통 알파 테스트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게임이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은 2004년에 출시됐다. 서비스 8000일을 넘겼고, 스무 살이 된 해에는 역대 최고 매출까지 기록했다.
#2스물두 살짜리 게임이 다시 알파 테스트를 한다. 게임은 마비노기다. 2023년 시작된 를 통해 오래된 자체 엔진을 언리얼 엔진으로 바꾸고, 20년 넘게 쌓인 세계를 새로운 기술 위에서 다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26년 6월에는 22주년 판타지 파티에서 실제 시연까지 이루어졌고, 9월 3일부터 6일까지 알파 테스트가 예정됐다.
#3왜 그냥 새 게임을 만들지 않는 걸까. 왜 22년 된 게임을 굳이 뜯어서 다시 만드는 걸까.
#4그 질문에 답하려면 2004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 김동건이라는 개발자가 MMORPG에 조금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5꼭 몬스터만 잡아야 하나?
#62004년의 MMORPG는 대체로 명확했다. 몬스터를 잡는다. 레벨을 올린다. 더 강한 몬스터를 잡는다. 더 좋은 장비를 얻는다. 그리고 더 강한 몬스터를 잡는다.
#7대단히 일관된 생태계였다. 몬스터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다. 그런데 김동건과 이 만든 마비노기는 조금 달랐다. 판타지 세계에 들어갔는데 양이 있었다. 양털을 깎을 수 있었다.
#8깎은 양털로 방직을 해 실을 만들고, 천옷만들기로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옷을 만들었으면 끝인가 싶었는데 염색까지 할 수 있었다. 세계를 구하러 왔는데 어느 순간 의류 산업의 밸류체인을 구축하고 있었다.
#9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요리를 했다. 낚시를 했다. 광석을 캤다. 캠프파이어를 피웠다. 악기를 연주했다. 작곡까지 했다. NPC에게 일을 받아 아르바이트도 했다.
#10현실에서 학교와 직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사람이 컴퓨터를 켜고 판타지 세계에 접속한 뒤, 다시 출근했다.
#11마비노기가 내세운 말은 그래서 단순한 홍보 문구 이상이었다. 판타지 라이프. 판타지 세계의 영웅이 되는 게임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에서 살아보는 게임이었다.
#12그렇다고 마비노기에 거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초기 마비노기의 대표적인 메인스트림 G1 "여신강림"에는 이름 그대로 여신과 세계의 비밀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었다. 켈트 신화에서 가져온 이름과 모티프가 곳곳에 깔렸고, 플레이어는 에린의 거대한 사건 속으로 들어갔다.
#13마비노기는 플레이어에게도 이름을 붙였다. 밀레시안. 에린이라는 세계에 나타난 이방인이다.
#14그리고 마비노기를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는 밀레시안의 시작과 환생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15문제는 세계의 운명이 아무리 급해도 밀레시안의 삶에는 다른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16여신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양털도 깎아야 한다. 세계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시간이 됐다. 전설적인 장비를 얻었다. 그런데 색이 마음에 안 든다.
#17세계를 구하는 것은 잠깐 미뤄도 된다. 염색이 안 끝났다. 이 이상한 우선순위가 마비노기의 정체성이 됐다.
#18마비노기의 진짜 특이함은 생활 스킬이 많았다는 데 있지 않았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교적 느슨하게 정했다는 데 있었다.
#19전사가 마법을 배워도 됐다. 마법사가 갑자기 요리에 빠져도 됐다. 전투하기 싫은 날에는 낚시를 해도 됐다. 악보를 만들어 연주해도 됐다. 그냥 사람들과 앉아 있어도 됐다.
#20그리고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던바튼 광장에는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주변에 모였다. 누군가는 옷을 자랑했다. 누군가는 대화를 했다. 누군가는 그냥 앉아 있었다.
#21던바튼은 어느 순간 던전으로 가기 위한 중간 지점이 아니라 중세 판타지판 홍대입구가 됐다.
#22몬스터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MMORPG에 등장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지 않고 광장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23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마비노기는 꽤 일찍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온라인게임에 들어온 사람이 반드시 계속 게임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세계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242004년 마비노기 정식 서비스를 앞두고 넥슨은 당시 인기 그룹 쥬얼리의 를 모델로 기용했다.
#25광고에는 현대의 건물 옥상과 판타지 세계가 함께 등장했다. 현실과 에린의 두 사람은 같은 선율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질문 하나가 나왔다.
#26"넌 지금 어디에 있니?" 마비노기라는 게임과 묘하게 잘 맞는 문장이었다. 사람들이 정말 다른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7티르 코네일. 던바튼. 캠프파이어. 길드. 낚시터. 광장. 처음 보는 사람과 모닥불 앞에 앉았다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전투를 하러 만났다가 몇 시간 동안 이야기만 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게임 속 장소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만났던 장소가 됐다.
#28그리고 캐릭터에게는 실제로 나이가 있었다. 마비노기의 캐릭터는 나이를 먹었다. 다시 어려지고 싶으면 환생하면 됐다. 현실에는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은 기능이었다.
#29이 독특한 게임을 만든 데브캣의 역사도 평범하지 않았다. 초기 마비노기의 아트 디렉터였던 은 이후 의 디렉터가 됐고, 훗날에는 를 만들었다.
#30연결해서 보면 묘하다. 마비노기에서는 사람을 판타지 세계에 넣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고민했다. 듀랑고에서는 사람을 공룡이 돌아다니는 세계에 떨어뜨려놓고 다시 어떻게 살아가는지 고민했다.
#31세계만 바뀌었지 "여기서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묘하게 이어진다.
#32데브캣은 그 밖에도 개썰매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 카드게임 , 그리스 신화를 SF로 옮겨놓은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33게임 목록을 보다 보면 "다음에는 무엇을 만들까?"보다 "이번에는 또 뭘 만들려고 그러지?"가 먼저 나온다.
#34회사 이름부터 개발자를 뜻하는 Developer와 고양이 Cat을 합친 devCAT이었다. 처음부터 약간 낌새가 있었다.
#35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조금 많이 흘렀다. 캐릭터는 환생했다. 또 환생했다. 또 환생했다.
#362004년에 중학생이었던 플레이어는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은 직장인이 됐다.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부모가 됐다.
#37캐릭터에게는 나오를 만나 다시 어려지는 방법이 있었지만, 플레이어에게는 없었다.
#38게임도 같이 늙었다. 오래된 시스템과 기술적 한계가 쌓였다. 운영과 과금에 대한 불만도 쌓였다. 특히 세공 도구와 확률 공개 문제를 둘러싼 불신은 점점 커졌다.
#39오랫동안 서비스했다는 것은 추억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고쳐야 할 것이 17년치 쌓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40그리고 2021년, 결국 폭발했다.
#41마비노기에는 수많은 탈것이 있었다. 말도 있었고, 독수리도 있었고, 판타지 세계답게 훨씬 더 신기한 것들도 있었다.
#42그런데 2021년 밀레시안들이 넥슨 앞에 소환한 것은 달랐다. 트럭이었다.
#43당시 넥슨 직원이 마비노기 이용자를 비하했다는 내용의 익명 커뮤니티 캡처가 퍼지면서 분노가 커졌다. 해당 이미지는 나중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44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는 사건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된 운영 문제와 세공 확률 비공개,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한 불신이 쌓여 있었다.
#45성냥 하나는 가짜였지만, 장작은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별로 웃긴 이야기가 아니다.
#462021년 3월 13일. 개발진과 이용자 대표가 만났다. 오후 2시에 간담회가 시작됐다. 저녁이 됐다. 계속했다. 자정이 됐다. 계속했다. 날짜가 바뀌었다. 계속했다. 다음 날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4714시간이 넘는 밀레시안 간담회였다. 디렉터를 비롯한 개발진은 이용자들의 질문을 받았고, 세공 확률 공개와 운영 개선 등을 약속했다. 이후 세공 도구 확률이 공개됐고 이용자들이 제시한 수백 개의 개선 요구에 대한 답변과 후속 조치가 이어졌다.
#48간담회 자체의 답변이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도 거셌다. 그리고 이것을 "유저들의 사랑이 너무 커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아름답게 포장해서도 안 된다. 분노는 분노였다. 불신은 실제로 존재했다.
#49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남는다. 17년 가까이 된 게임에 아직 저렇게 화낼 사람들이 있었다. 무관심해졌다면 트럭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50오래된 MMORPG의 이야기라면 여기쯤에서 결말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사람들이 떠난다. 업데이트 규모가 줄어든다. 어느 날 서비스 종료 공지가 올라온다.
#51마비노기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2021년 이후 개발팀은 이용자 요구와 개선 사항을 추적하고 소통 방식을 바꾸려는 작업을 이어갔다.
#52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은 아니다. 20년 가까이 쌓인 문제를 한 번의 간담회로 없앨 수도 없었고, 이후에도 업데이트와 밸런스, 과금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됐다.
#53그런데 게임은 다시 움직였다. 2026년에 이르면 이용자와의 약속 이행 상황을 공개하는 '마비노기 커넥트'가 운영되고, 22주년 여름 업데이트에는 아예 "RE"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런 문구가 붙었다.
#54"밀레시안의 목소리, 그리고 마비노기의 응답." 2021년에는 이용자들이 트럭을 보내 답을 요구했다. 5년 뒤에는 개발팀이 '응답'이라는 단어를 업데이트 전면에 내걸고 있었다.
#55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 문장으로 성공담처럼 정리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관계가 이전과 같지는 않았다.
#56그리고 2023년, 개발팀은 더 이상한 선택을 발표했다. 마비노기 이터니티 프로젝트. 20년 가까이 된 게임의 엔진을 언리얼 엔진으로 교체한다.
#57오래된 온라인게임의 기술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선택은 두 가지다.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후속작을 만든다.
#58마비노기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길을 골랐다.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는 집에서 골조를 바꾸기로 했다.
#59방만 새로 꾸미는 것이 아니다. 20년 동안 쌓인 캐릭터와 콘텐츠와 공간을 새로운 기술 기반 위에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60그런데 너무 바꿔도 안 된다. 티르 코네일의 길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3D 데이터가 아니다. 스무 해 전 처음 걸어본 길일 수도 있다. 던바튼의 건물 하나가 개발자에게는 오래된 게임 자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친구를 처음 만난 장소일 수 있다.
#61그래서 이터니티는 단순한 그래픽 리마스터보다 어려운 질문을 품는다. 어디까지 바꿔도 여전히 마비노기인가?
#62기술적으로는 엔진 교체다. 감정적으로는 기억의 복원에 가깝다.
#63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2024년. 마비노기가 스무 살이 됐다.
#64보통 온라인게임의 전성기는 출시 직후에 온다. 마비노기는 달랐다. 오래됐다. 시스템도 낡았다. 트럭도 맞았다. 엔진은 이제 통째로 갈아야 했다.
#65그런데 넥슨에 따르면, 20주년이 된 2024년 마비노기는 역대 최고 수준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 세계 누적 이용자도 3,300만 명 규모에 이르렀다.
#66가장 젊었을 때가 아니었다. 10주년도 아니었다. 스무 살이었다. 처음부터 평범한 RPG의 성장 공식을 따르지 않던 게임은 성장곡선까지 이상했다.
#67그리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처음 마비노기를 만들었던 김동건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68또 마비노기를 만들고 있었다. 마비노기 모바일. 2017년 처음 공개됐다. 사람들이 기다렸다. 2018년에도 모습을 보였다. 기다렸다. 몇 년이 더 흘렀다. 스마트폰을 바꿨다. 기다렸다. 스마트폰을 또 바꿀 만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개발하고 있었다.
#69개발 기간이 길어지면서 투입된 자금 규모도 커졌다. 넥슨코리아가 2021년 이후 데브캣에 지원한 개발 관련 자금만 1,000억원을 넘었다.
#70그리고 2025년 3월 27일. 공개 이후 거의 8년 만에 정말 출시됐다.
#71김동건은 이 무렵 마비노기를 자신의 "인생에 가까운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72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2000년 넥슨에 들어가 젊은 개발자로 마비노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사람이 20여 년 뒤 데브캣 대표가 되어 또 다른 마비노기를 세상에 내놓고 있었다.
#73어떤 사람에게 마비노기는 학창 시절의 게임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친구를 만난 장소였다. 김동건에게는 젊어서 만들기 시작해 중년이 되어서도 만들고 있는 세계였다.
#74그리고 그가 새로운 마비노기를 설명하며 계속 꺼낸 말도 묘하게 처음과 닮아 있었다.
#75여유. 낭만.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기술은 완전히 바뀌었는데 질문은 여전히 비슷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재미있을까?
#76다시 2026년이다. 마비노기는 서비스 8000일을 넘겼다. 6월 27일 열린 22주년 판타지 파티에는 3,000명의 밀레시안이 모였고, 사람들은 개발 중인 이터니티를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8월에는 알파 테스터 선정이 진행됐다. 9월 3일부터 6일까지 첫 알파 테스트가 예정됐다.
#77이제 처음의 이상한 문장이 이해된다. 스물두 살짜리 게임이 알파 테스트를 한다.
#78새 게임이 태어나려는 것이 아니다. 22년을 살아온 게임이 기억과 캐릭터와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태어나려는 것이다.
#79마비노기는 처음부터 캐릭터가 환생하는 게임이었다. 22년 뒤에는 게임 자체가 환생을 준비하고 있다.
#802004년 어느 날 누군가 마비노기에 처음 접속했다. 티르 코네일을 돌아다녔다. 양털을 깎았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던전을 돌았다.
#81그러다 어느 날 캠프파이어 앞에 앉았다. 옆에는 처음 보는 플레이어가 있었을 것이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로그아웃했다.
#82게임에서는 별 성과가 없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인생에서는 남았다.
#8322년이 흘렀다. 던바튼은 아직 있다. 티르 코네일도 있다. NPC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84하지만 2007년 어느 밤 광장에서 함께 떠들던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닉네임조차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이상하게 그날의 분위기는 기억날 수도 있다.
#852004년 마비노기 광고는 물었다. "넌 지금 어디에 있니?" 그때는 현실에 있는 사람을 에린으로 부르는 질문이었다. 22년 뒤에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86캐릭터는 수없이 환생했다. 김동건은 아직 마비노기를 만들고 있다. 게임도 이제 한 번 크게 환생하려 한다. 플레이어만 정말로 스물두 살을 더 먹었다.
#87그래서 마비노기가 22년 동안 팔았던 것은 어쩌면 판타지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양털도, 던전도, 여신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88판타지 라이프라는 말에서 정말 중요했던 것은, 어쩌면 판타지가 아니라 라이프였는지도 모른다.
#89마비노기가 그렇게 오래 남긴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장소 하나였는지도 모른다.